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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n 04. 2021

혼자 걷는 길 (feat. Anne Shirley)

나는 혼자가 아니다.


사는 곳에서 이방인으로 머무르고 싶은 건 생활 여행자 마음을 유지하고 싶어서일 게다. 시간이 지날수록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늘어난다. 늘어나는 모습을 그래프로 표시한다면 사선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계단 모양으로 표시할 수 있겠다. 한동안 알고 있는 장소를 무던히 들락거리다 보면 그제야 그 너머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안에서만 가늠해도 나의 존재가 개미만큼 작은 소인, 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거인이 되어 나를 둘러싼 주변을 위에서 한꺼번에 봐 버린다면 짜릿은 하겠지만 재미없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장소만 볼 수 있기에 그 너머가 궁금해진다. 길은 끝없이 뻗어있고 낯선 곳의 새로운 길은 무궁무진하다.


지금까지 가 본 장소를 집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려보면, 두 번째 원까지 진출한 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난봄 갑자기 다섯 번째쯤 되는 곳으로 훌쩍 뛰어 버렸다. 한동안 그곳을 궁극의 장소 인양 찬양하고 들락거리다 연어처럼 다시 집 근처로 돌아와 조신하게 익숙한 장소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세 번째 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계엔 영원한 맞수 K대와 Y대 농과대학 덕소 농장이 있다. 실습농장까지 경쟁을 하는 건 아닐 테고, 같은 지역에 있다는 게 의아스럽지만 서울에서 가깝고 땅값이 싸서 그렇지 않을까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생각해 본다. 실습농장 이라지만 한 번도 학생들을 본 적은 없다. 산 중턱에 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Y대 농장과 달리 K대 농장은 도심과 가깝고 문이 활짝 열려 있어 자주 산책을 간다. 일부의 사람들이 도시공원처럼 애용을 하지만 도시공원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얼마 전 모내기를 끝낸 너른 들판에는 목이 긴 백로, 청둥오리  같은 새들이 날아와 부리를 논에 박고 열심히 물질을 하고 있다. 시설 농법으로 온 들녘이 비닐하우스로 가득한 고향 시골 마을에서도 보기 어려운 광경을 명색이 ‘시’인 이곳에서 보고 있다. 거기다 여름을 향한 연꽃 웅덩이, 허브 농장 라베다 밭엔 보라색 물결이 출렁일 준비가 한창인데, 이곳을 참새방앗간처럼 들락거리다 주변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이다. 지도를 보고 감지한 길을 머릿속으로도 그려봤다. 도심과 가까운 길에서 시작하여 Y대 농장 입구를 지나 끝자락이 이 농장이 되는 코스가 완성되었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 가냐고요?


길은 그곳을 지나는 이동 수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맵으로 길을 검색하면 자동차, 버스, 걷는 사람, 자전거, 네 가지 방법으로 안내한다. 대중교통인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라면, 자동차가 갈 수는 있으나 외길이라면, 자전거를 타거나 걷기에 알맞다. 지난 주말 자전거를 얻어 타고 가보지 않은 일 차선 그 길을 일단 한번 가 보았다. 자전거로 스쳐 지나가거나 한 번씩 세워 둘러보기엔 아까운 길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숲과 길에서 꼼지락 거리며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가 되어야 했다.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천 가지의 미묘한 기쁨을 놓치지 않기위해. 분명 아까워한 그 부분을 보여 줄 것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흐린 날 산길은 향기와 초록을 더 진하게 보여 준다는 걸 안다. 한번 쓱 지나간 길이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한적한 산길을 혼자 간다는 게 조금 긴장감을 불러왔지만, 이럴 때면 국민학생이던 시절 해 짧은 가을날 운동회 연습 마치고 어둑어둑한 무덤길을 홀로 걸어왔던 그날을 생각한다.


알고 있는 길을 지나 세 번째 원으로 진입하는 낯선 동네로 가는 길을 들어섰다.


모퉁이, 그 모퉁이 길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 기다라고 있을 거라고 믿을 거예요. 모퉁이 길은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 모퉁이를 돌아서면 어떨지 궁금해요. 어떤 초록빛 영예와 각양각색의 빛과 그늘이 있을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있을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을지, 어떤 모퉁이와 언덕과 계곡이 펼쳐져 있을지 말이예요.(빨간 머리 앤 중)


모퉁이 돌아서니 농촌 마을이 나온다. 전철역과 큰 도로에서 조금 더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피안의 세계처럼 고요하다. 마침 뻐꾸기 우는 소리까지 들려 농촌의 아이였던 그 시절, 모내기 끝낸 들판이 주는 대낮의 나리함과 적막감이 훅 들어온다. 아무리 환경이 변해도 한갓 하루살이 몸짓에 지나지 않은 우리 짧은 삶 속에서 무엇이 그렇게 변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자연과 더불어 계절 따라 사는 모습은 늘 어디선가 반복되고 누군가의 삶을 지켜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변하여 이런 모습을 잊고 잃어버리고 살았던 게지. 걷는 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미묘한 추억일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랑 사뭇 다른 풍경에 애틋함까지 몰려왔다.


마을을 지나 산길로 진입하는 오르막을 숨 가쁘게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린다. 언니 나이뻘쯤 되는 두 사람의 수다 소리가 고맙게도 안전 지킴이가 되었다. 목소리가 사라질까 봐 뒤를 자꾸 힐끔 거렸지만 두 분은 자기들 이야기에 취해 앞서가는 사람한테 관심이 없다. 오르막 끝엔 내년 봄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하는 ‘좌’ 버찌 주렁주렁 벚나무와 ‘우’ 향긋한 소나무 가로수 흙길이 경이롭게 이어졌다. 보기 좋다고요? 어머, 보기 좋다는 말만으론 부족해요. 아름답다는 말도 적당하지 않고요. 그 낱말들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아, 경이롭다. 그래요, 경이롭다예요. 제 상상력으로도 더 멋지게 만들 수 없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빨간 머리 앤 중)


더 오르면 Y대 농장이 나오는 네 갈래 길에 이르게 되고 왼쪽 길 클릭! 다른 느낌의 오롯한 외길이다. 오히려 한적해지니 마치 숲 속 품에 안긴 듯 포근한 안도감이 들어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밤꽃 냄새가 도드라진 초여름 숲 냄새는 향긋하고 비릿하게 습기를 머금고 공기가 되었다. 마을에서 들은 그 뻐꾸긴지, 산울림으로 도드라진 뻐꾸기 소리(난 네가 하는 탁란을 알고 있지…)도 무죄.

근처 농장이 있어서인지 요런 소품이


유일하고 특별한 집을 만났다. 무덤, 꽃밭, 텃밭을 세트로 두르고 있는 아담한 집이다. 마침 주인아주머니가 보이길래 집이 예쁘다고 호덜갑을 떨며 사진을 찍고 싶다 했더니 흔쾌히 들어오라며, 돈이 없어 이런 산골에 살지 뜻밖의 말을 던지고는 마침 부른 택시를 타고 홀연히 어디론가 가버린다. 주인 없는 마당을 서성이며 잘 가꾸어진 텃밭, 꽃밭을 구경하고 나오다 병풍처럼 드리워진 뒤꼍의 무덤들을 보았다. 생과 사, 노동과 즐거움이 한판에 펼쳐진 숲 속의 집…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고 당부도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가버린 so 쿨한 주인을 닮았구나, 하하!


그러고 보니 이 길엔 무덤이 제법 많다. 잘 가꾸어진 곳도 있지만 상상을 자극하는 자연에 스며든 무덤까지.

산딸기 어린 나무로 덮힌 상큼한 무덤과 쇠뜨기로 덮힌 보슬보슬한 무덤

죽어서도 형체를 만들어 기억되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굳이 생활 먼 곳에 무덤을 둘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모든 건 살아있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꽃밭을 가꾸는 마음으로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에 있다면 돌봄의 모습만 달라질 뿐 삶도 죽음도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다가온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계신 이후로 드는 생각은 아버지와 나는 함께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다.


산책하는 어린이집 아이들 소리, 개 짖는 소리다. 사람 사는 곳 마을의 소리다.


마을을 가로질러 얕은 능선을 오르면 오늘의 마지막 여정, 요즘 K대 농장은 하지 무렵 긴긴낮을 지난 석양 노을이 장관이다.  두 사람은 언덕 꼭대기를 막 넘었다. 아래로는 워낙 길고 구불구불해서 꼭 강처럼 보이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 중간쯤에 다리가 있고, 거기서부터 그 너머로 검푸른 만이 보이는 누런 모래 언덕 지대가 연못을 가둬 둔 아래쪽 끝까지, 물이 온갖 빛깔들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가장 영적인 색조를 띤 주황빛과 장밋빛, 그리고 영묘한 초록빛과,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갖가지 기묘한 빛깔들이었다.(빨간 머리 앤 중)

바다, 호수, 강.. 물에 비친 어느 노을이 예쁘지 않을까만 모내기한 논에 비친 노을이라니, 비록 어렸지만 많은 날들을 들판 가까이서 보냈는데 이토록 근사한 빛깔을 옆에 두고 난 무엇에 몰두하고 있었을까. 해질녘 오징어 가이생(가이상) 놀이를 하던 쩌렁쩌렁 온 동네가 울리도록 놀던 그날 우리들을 에워싼 것은 분명 노을빛이었고,  







우리가 노을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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