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신성함을 느끼게 된다. 많은 저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책등은 묘비처럼 느껴진다. 그곳은 죽은 이와 산 자가 가장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 신경 쓰는 사람도 거의 없다. 김영하, <읽다> *도서관의 말들 p 59
스스로에게 부끄럽게도 젊은 날 나는 멋으로 베스트셀러나 가끔 사는 비독서인이었다. 공공 도서관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주말에 나들이 삼아 찾아간 그때부터다. 빠른 걸음으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현재 도서관을 포함해 세 곳 정도가 내 도서관 이력인데, 대부분 공공도서관이 그러하듯 동네에서 조금 높은 곳, 창밖이 초록인 곳이다. 초록의 기억이 과거로 갈수록 희미해진다. 지나온 시간의 길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누구를 위한 도서관이었는지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첫 공공 도서관은 아이들을 위해 간 곳이어서 힘들게 언덕배기를 올라갔던 기억만 있지 산기슭임에도 초록에 대한 기억은 없다. 두 번째는 아이들과 나 반반쯤 되어 가끔 고개를 들면 넓은 창 너머로 초록이, 앙상한 나무가 눈으로 마음으로 조금 들어와 조금 아늑했었다. 요즘은 초록이 들어오다 못해 책을 보다 졸리면 바로 가방을 싸서 초록의 장소인 맞은편 산 아래 냇가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도서관에서 도서관에 관한 책을 발견하고는 뜻밖의 독서 의욕이 일었다. 작가의 말처럼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컸다. 글수저도 학수저도 아닌 작가는 책이 좋아 도서관 이용자에서 도서관 사서가 되길 꿈꾸었고, 마침내 사서가 되었지만 또 미련 없이 박차고 나와 독립출판물을 쓰고 마침내 1인 출판사를 하고 있다. 조용히 좋아하는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 쓴 도서관에 대한 도서관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은 마음과 실천만 따르면 아마추어들도 소소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시대라 평범한 사람이 쓴 책이라 했지만 이 책을 쓰기 위해(책과 도서관에 관한 문장을 모으기 위해) 수많은 책을 수집하고 100권의 책을 선정하는 등 도서관에서 지난했을 날들을 생각하면 진정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평범은 이제 넘어선 것 같다.
도서관을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닌 성장하는 유기체로 보고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 속 좋은 문장들을 도서관의 말이라고 했다. 그냥 이용자가 아닌 한때 사서였던 이용자는 도서관의 말들 옆에 자신이 보고 듣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채집한 말들의 출처는 국내외 유명 작가들부터 이름 없는 독립출판물 작가, 영화, 도서관 행정기관 웹사이트, 심지어 온라인에 떠도는 카툰까지 이른다. 여성이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 한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 도서관을 늘 낙원으로 생각한다는 보르헤스의 말로 시작된 말들의 향연은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포기하고 도서관에 간다는 스티븐 킹의 말로 끝을 맺는다. 중간은 지성과 현실의 목소리들 옆에 도서관과 책을 매개로 마흔에 작가 된 저자의 고단하고도 포기하지 않았던 삶을 지탱해준 앎의 기쁨이 채워진다.
나는 도서관에서 어떤 말이나 기척을 찾았으면 했다. 슬픔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후회나 미안함 같은 감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 튜브 비슷한 것. 김금희,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이 책을 쓰기 전까지 몰랐던 *<사라예브스카 하가다>란 책의 발견이 이 책을 쓰는 의미로까지 다가오는 특별한 경험을 전하는 부분에서는 함께 살짝 달떴다.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발견의 희열, 가만히 앉아서 세상의 중심이 된다. 반면 일본 작가 우치누마 신타로의 <책의 역습>에 따라온
(….) 서점도 도서관도 이미 책을 읽는 습관이 있는 사람에게 ‘ 이 책의 재미’를 전하는 것은 열심이면서, 아무도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 책이라는 것의 재미’를 전하지는 않습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부모님에게 자신의 일을 설명하는 부분은 애잔함을 일으켰다. 자식이 월급 받고 살기를 소망하며 서점이나 도서관에 거의 가지 않을뿐더러 책에 관심 없는 나이 많은 부모님에게 글을 쓰고 출판일을 한다는 사실을 가장 마지막에 알린다. 얘길 들으며 어린아이 표정이 되는 부모님, 부모의 그릇을 넘은 자식은 찬란하고도 쓸쓸하다.
책과 도서관에 관한 반짝이는 문장들을 읽으며 당장 도서관에 달려가 언급된 책들을 모두 찾아 읽고 싶지만 이 또한 지적 허영심이라는 걸 안다. 막상 보면 지루한 책도 있을 것이고 그토록 원했던 책을 손에 잡는 순간 독서 의욕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책 읽기도 물욕처럼 허무함을 동반할때도 있다. 그럼에도
여름이 다가오면서 그녀는 에어컨이 가동되는 도서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곳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책장에만 정신을 집중하며 열심히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줌파 라히리, <저지대>
도서관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더위 피신처라 이번 여름에도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돋보기를 고쳐 쓰가며 필사 삼매경에 빠진 어르신이 늘 있는 그곳으로. 뜻밖의 책은 가야만 만난다.
* <사라예브스카하가다> : 양피지에 중세 히브리어로 쓴 유대교 경전 채색 필사본이다. 수 세기 동안 분쟁과 시련의 역사를 관통하여 주인을 옮겨 다니던 이 책은 1894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 박물관에 들어가게 된다. 여러 차례 유실 위험을 겪었으나 그때마다 사서들이 목숨 걸고 지켜 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월스트리트 저널 특파원 제럴딘 브룩스는 이에 영감을 얻어 장편소설 <피플 오브 더 북>을 완성한다.
강민선 작가는 이 책에 대한 강렬한 끌림으로 마침내 유네스코 유산 웹사이트를 뒤져 필사본을 지키려 했던 사서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들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챌 수 있는지 시험하려고 우리에게 온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이 된다는 것, 무슬림이 된다는 것, 가톨릭교도나 정교회 신자가 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