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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Nov 02. 2021

물을 물로 보이게 하는 것

이수지, <나의 명원 화실>


가을산은 게으른 자에게 작은 봉우리도 허락하지 않았다. 산 입구 동네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노란 카펫처럼 은행잎이 푹신해진 절 입구를 통과하여 나오는 산행 지도 앞에서, 우리 여기까지만 갔다 오자, 가깝고 가장 낮은 봉우리를 손끝으로 쉽게 가리켰다.


사람 손길이 덜 간 산길은 투박했지만 완만하여 오를만했고 울긋불긋 잎이 꽃이 된 나무들은 화려했다. 온 산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산행이 좀 썰렁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인다는 불안감이 슬쩍 올라오기까진 그래도 걸을만했다. 앞서가던 운이 갑자기 뒤돌아보며 내려가자고 했다. 왜? 더 올라갔다간 내려올 때 해가 지겠어.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 정도 왔으니 조금만 더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맵을 본 순간 무너졌다. 평지와 산의 거리감은 왜 이렇게 다른지, 겨우 반밖에 안 왔다.


깨끗이 발길을 돌리며 주변에 사람이 없는 이유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가을산을 아는 이들은 일찍 서둘러 우리가 올라가던 시간에 이미 다른 봉우리로 건너가 다른 길로 내려오며 일찍 지는 해를 달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냥 가을산이 보고 싶어 달려온 우리는... 터벅터벅 내려오며 물웅덩이 가까이 바위에 앉아 정상에서 먹으려고 가져온 과일이나 먹기로 했다. 우적우적 씹으며 제법 물이 모여있는 웅덩이를 바라본다. 여름이라면 철철 흐르는 물소리에 발을 냉큼 담갔을 곳이지만 어느새 웅덩이가 되어  우수수 떨어진 낙엽을 안고 푸르고 하얀 물빛이 잔잔히 일렁일 뿐이다.




<나의 명원 화실>과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이 생각났다. 그때도 가을이었는데 미술 시간에 그린 가을 풍경화가 처음으로 교실 뒷 벽 솜씨자랑 코너에 붙었다. 어쩐지 겉멋이 부려졌고, 그림이 뽑힐 것 같았고, 정말로 그렇게 되고 나니 뽑히는 그림에 대한 촉같은게 왔다. 이 책에도 학교에서 뽑히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를 졸라 가게 된 화실에서 상상하던 진짜 화가를 만난다. 수강생은 단 4명, 가을 스케치 나온 날 형체 없는 물을 그리라는 진짜 화가의 말에 아이는 난감하다.

(...) 물을 한 번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물은 색깔이 없는데 어떻게 그린단 말이지?’


“물속에 잠긴 것, 물 위에 뜬 것과 물 위에 비친 그 모든 것들이 물을 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것이 물을 그리지 않고서도 물을 그리는…”

물을 그리려 애써 본 적이 없는 나에게도 작은 파동이 일었다. 그렇네… 등대나 배, 바위, 갈매기, 물고기, 오리, 수생 식물, 물에 비친 고혹적인 그림자들 그리고 요런 작은 웅덩이엔 소금쟁이, 가을 낙엽들, 모두 그릴 수 없는 물을 물로 보이게 하는 것들이었다. 친구들 노는 소리에 선생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지만,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어린 마음에 스며들었는지 훗날 그림책 작가가 된 아이는 그때 선생님, 진짜 화가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삶에 영향을 준 만남이나 지점을 물으면, 아마 그때였던 것 같아,라고 짐작으로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모습을 있게 한 결정적인 순간일지언정 그때는 일상 중 한 자락일 뿐, 그럼에도 그 자락을 스쳐간 작은 울림과 선택들은 차곡차곡 엮어져 인생의 색깔로 나타난다. 마음에 들 수도 안들 수도 있지만 마치 색깔 없는 물이 주변 것들을 그리면 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나타났다.


학교에서 뽑히는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던 아이는 선생님 방에서만 나는 테레빈 기름 냄새를 탐하고, 평가하지 않고 툭툭 던지는 알쏭달쏭한 말들에 , 직접 그려준 생일카드 그림에서 받은 따끔따끔한 마음에, 뽑히는 그림보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한다. 상가에 있던 학원이 어느 날 화재로 깜쪽같이 사라지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진짜 화가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지만 이미 화가로 성장하는 씨앗에 거름이 담뿍 뿌려진 후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받은 마음을 돌려주는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세계적) 그림책 작가가 된다. 그리고 진짜 화가를 만나지 못한 난 사진을 찍고 글로 일상을 단순하게 그린다.





아웃도어 옷에까지 관심을 보이며 주말이면 산으로 향하는 열망이 뿜뿜 솟는 운에게 어디 산악회에 드는 건 어떻냐고 권했더니, 내 속도로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랬었지, 그동안 다른 사람들 속도에 맞추지 못한 그리고 않은, 우리 삶의 조각들은 해 짧은 가을날 오후에 등산을 가다가 중간에 돌아오는 게 일상이 되고, 옆길로 잘 새어 어딘지 주변 빛깔과 어울리지 못하는 듯 과하게 단풍이 든 나무를 신기하게 바라본 소소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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