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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일기 2

씨앗 나누기

by 여름지이


노르웨이령 북극 스발바르 제도와 경북 봉화군은 공통점이 있다. 인류 대재앙에 대비해 온갖 씨앗들을 미리 저장하고 있는 국제 종자 저장고, 시드 볼트(씨앗 금고)가 있는 곳이다. 재난 영화나 소설에서도 마지막 희망의 노래로 아이 울음 소리나 씨앗이 등장하는 걸 보면 시드 볼트의 의미가 진하게 다가온다.


인류의 마지막 보루가 될 소중한 씨앗을 나누어 준 사람이 있다. 지금은 흔한 씨앗이지만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세상에 한 알이 떨어진다면 그리고 꽃이 핀다면 다시 생명이 움트는 기척이 될 꽃씨들을.


지난봄, 글로 만난 그녀를 글에 나왔던 카페에서 만났다. 카페 은행나무 밑동에 제비꽃이 뱅둘러져 있다는 걸 아는 우리는, 또 알고 보니 고향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이었다. 현재도 서로 가까운 곳에 살아 만나게 되었는데, 글에서 풍겨오는 친근함이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우리, 의 두서없는 말들이 오갔던 그날 그녀는 까만 꽃씨들이 담긴 투명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는 고마운 마음밖에 달리 드는 마음이 없었지만 집에 와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잊었던 순수함이 떠올랐다. 꽃씨를 선물로 주다니, 그녀는 흙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를 걸었고 이 계절 쑥부쟁이를 하릴없이 꺾었을 아이, 맞을 것이다.


야생에서 마음껏 세력을 떨치며 꽃을 피우는 것들을 좁은 화분에 가두어 키운다는 게 욕심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봄만 되면 마음이 들썩들썩 씨앗 뿌릴 화분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녀가 준 제주도에서 씨앗털이 했다는 하얀 나팔꽃, 풍선초, 그리고 사랑초, 이렇게 세 가지 씨앗까지 손에 들려 있었으니, 조금 늦었지만 또 시작하고 말았다.


똑똑! 씨앗들은 많이 컸나요? 울 집건 요만큼 ㅎㅎ(그녀)

와우, 제법 컸네요. 우리 건 이제야 올라오고 있어요. 풍선초는 겨우 한 개 ㅠ.

풍선초가 늦어요. 물 많이 주세요.


이렇게 우리들 식물 교환 카톡은 시나브로 시작되었다. 같은 씨앗, 다른 장소,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파종시기, 이런 조건들로 닮은 듯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주고받았던 두 계절의 시간은 꽤 흥미롭고 신선했다.

그녀의 풍선초와 하얀 나팔꽃은 안전하고 정리된 베란다에서 관리를 잘 받아 쪽 곧고 가지런히 덩굴을 성큼성큼 자아내더니 하얀 꽃을 일찍 피웠다.


우리 집 아그들의 수난사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다. 지나고 보니 수난의 시작은 그녀의 집처럼 넓은 베란다 대신 제법 나와있는 창밖 난간에 기대어 키우려 했던 게 문제였다. 일부러 그러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지만 키울만한 장소가 그곳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키우려 했던, 자연을 눈앞에서 가지려 했던 열망과 본능이 과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다.

잃어버린 야생성에 대한 인간의 열망. 자연을 찬미하면서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 - 토머스 프렌치의 <동물원> 중

그런데, 정말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 나팔꽃은 꽃봉오리 자체에서 수분이 되는지 어디에 있건 열매를 맺는데 풍선초는 달랐다. 실내에서 우아했던 덩굴의 여왕, 그녀의 풍선초는 자잘한 꽃만 폈지 풍선을 결국 매달지 못했다. 바깥에서 모진 풍파에 시달린 것은 비록 적은 개수이지만 기특하게도 열매, 풍선이 달렸다. 척박한 환경에 대한 위기감으로 그렇게 된 건지 바람이 중매쟁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진감래라고 생명의 이유인 자손을 마침내 남기게 된 것이다.


벌써 9월 마지막 주, 수확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9월을 강타했던 태풍 그리고 또 비 등 고르지 못한 날씨에도 끄떡없던 풍선 열매가 밤낮의 일교차에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을빛을 닮아가는 모습에 더 이상 화분에 물을 주지 않으며 씨 받을 꿈을 키우던 한날, 어인 일인지 태풍 때보다 더한 바람이 풍선초가 있는 창쪽으로 몰아쳤다. 가장 가벼워진 시기에 가장 강한 바람이라니, 손에서 놓친 풍선 꼴이 될 것 같은 불안감에 과감히 대를 잘라 가지들을 손에 쥐었다. 얼떨결에 수확을 한 것이다.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금세 풀어보기(씨앗 털이) 아까워 리스를 만들어 벽에 걸어 보았다. 그리고 딱 풍선 한 개를 열어 보다가 궁금해하지 않았던 비밀이 풀리는 광경을 발견한다. 까만 씨앗에 사람이 일부러 그려놓은 듯한 하얀 하트 무늬가 무척 신기했을 뿐이다. 풍선 속 하약 속적삼 같은 막을 중심으로 들러붙은 씨들은 그 부분만 까맣지 않고 하트 모양 작업이 되어있다. 자연이 하는 일이 어쩜 이리 자손 대대로 정교한지….


가을이 무러 익으면 씨앗들을 들고 그녀를 처음 만났던 큰 은행나무가 있는 그 카페로 갈 참이다. 봄에 나누었던 씨앗을 가을에 또 나누며 우리의 가을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준 씨앗(좌), 내가 나눌 씨앗(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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