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30여 년 전 시어머니는 첫 며느리(me)를 봤다. 한창이었던 그때 어머니는 며느리만 오면 갖가지 폼나는 음식들을 보란 듯이 푸짐하게 차렸다. 해파리냉채, 구절판등 손이 많이 간만큼 화려한 음식들을. 이 나이에 요 정도는 할 수 있고(해야만 하고) 이 정도는 먹고사는 거 아이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늦게 감지했다. 집안 대소사 음식을 위해 성질도 안 좋고 일도 안 되는 며느리를 주방 보조 삼아 밤늦도록 칼질을 하는 호러물을 연출하는 날도 있었다.
가까이서 영향을 주고자 노력한 만큼 얼띤 며느리도 음식에 대한 강박이 생기긴 했다. 급변했던 세월만큼 사뭇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다를 뿐이다.
나는 정성을 다해 샌드위치를 만든다. 오래 살던 곳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며 는 것은 샌드위치 만들기 뿐이다. 샌드위치는, 어쩌면… 자유, 여유, 무소유, 구속하는 (일, 이) 없어 자유로워 여유도 생겼으며 이 생활이 눈물 나게 고맙고 감사하여 소유하고픈 게 없다. 그저 아침에 커피를 내리고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번 겨울에는 베이킹을 시도해 보았다. 집에 있는 고수들, 경쟁하듯 쉽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선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처음 만들어 본 케익이 먹을만한 게 신기할 뿐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남편 손님이 찾아오면 갓 무친 나물에 생선 한 마리, 속을 풀어 줄 따뜻한 국까지 있던 밥상을 아무 말없이 내오던 어머니 시대는 지났다. 며느리 볼 나이가 되면 무르익은 요리실력으로 차려야 했던 잔치상은 상품으로 고를수 있어 이젠 차리지 않아도 된다. 굳이 집에서 차리고싶고 할수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큰 축복인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벌써 부모 곁을 떠나 둘만 먹는 단출한 식사시간이 대부분이다. 혼자 먹는 시간도 많아 그럴 땐 나를 위한 간편하면서도 속 편한 음식이 필료한데 샌드위치가 안성맞춤이었다. 요즘 같은 겨울날엔 따뜻한 토마토 수프랑 먹으면 온 몸이 훈훈해 진다. 아이들 간식쯤으로 생각했던 것이 훌륭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며느리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가족의 일원이 된다면… 그 아이 앞에서 자랑하고픈 자랑할만한 음식은 없다. 운 좋게도 단둘이 함께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오기 전에 구웠으나 온기가 남아있는 과일 케이크와 차를 나누며 이야기를 듣고 싶다. 누군가의 딸인 그 아이 이야기를.
여러가지를 골고루 먹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세상도 넓어진다는 뜻이지. 먹는 건 중요해. 만족스러운 음식을 매일 제대로 먹을 것, 그러면 무슨 일을 하던 잘 될거야. -영화 <461개의 도시락>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