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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일기 1

여름 꽃 농사

by 여름지이

소소한 일상에도 고래가 반짝 너울거리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아하! 나팔꽃!


새로 살게 된 집, 창 너머 난간 끝에 세워진 쇠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 날이었다. 덩굴 식물이 가져다줄 초록숲까지 상상하며 알맞은 화분을 여러 날 고민하여 마침내 씨앗을 심었다. 그 무렵, 글 이웃이 건넨 제주도 하얀 나팔꽃과 하트무늬 풍선초 씨앗은 그 꿈에 불을 더 지펴 놓았다.​


씨앗들은 무러 익는 봄에 발맞춰 발아가 잘 되었고 검정 모자를 톡 쓰고 올라왔다. 모종들은 시루 콩나물처럼 한동안 고물고물 잘도 자랐다. 시작은 그러하였는데, 거실 창가에 쪼르르 놓아둔 화분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다이소에서 저면관수(밑에서 물을 흡수하게 하는 방법) 화분을 발견하고, 창문과 난간 틈에 꼭 알맞은 크기에다 불편할 물 주기까지 해결되었다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모종 이파리들이 좀처럼 어린 모습을 벗지 않아 가만히 살펴봤더니 뿌리가 저면관수 심지를 위한 바닥 틈들을 비집고 나가 정말 콩나물처럼 아랫 통 물만 먹고 있더라. 흙은 식물에게 지지대 역할 외에는 아무런 본연의 역할을 못하는, 싸구려 다이소 제품의 현실! 누구 아이디어로 나온 건지 알 수 없지만 저면관수만 알았지 식물의 생태는 잘 모르는 사람의 실패작이다. 역시 잘 모르고 산 이 소비자도 올해 나팔꽃 농사를 실패하게 생겼었다.


생겼었다,라고 한건 그때는 망쳤다 생각하고 그냥 그 화분들을 방치해 버렸다.

꿈에 부풀어 난간에 화분을 들이는 건 쉬웠지만 실패한 화분을 거둬들이는 건 어려웠다. 어렵기보다는 귀찮고 정리하고픈 의욕이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여름내 땡볕과 폭우에 시달려도 그냥 두었다. 사실은 그곳에 화분이 있다는 걸 잊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오면 죄책감과 미루어둔 집안일이 주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길었던 장마기간 마지막 폭우가 지나가고 뜻밖의 일이 찾아왔다. 바짝 말라 소생의 기미라곤 1도 없던 그곳에 푸른 잎과 키 작은 줄기에 꽃봉오리까지 맺은 모습이 발견되었다. 빗물이 생명수 역할을 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개입되어도 자연의 순리는 막을 수 없어 무심했던 관찰자는 그제야 힘을 보태고자 물을 듬뿍 부어 주었다. 꽃을 맺었으니 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새초롬이 한송이가 물방울까지 머금고 피었다.

요즘 우리 산하에 가장 많은 미국 나팔꽃

흔히 볼 수 있는 나팔꽃이지만, 집에서 핀 나팔꽃이지만, 야생에서보다 더한 어려움을 이겨낸 반갑고 귀한 꽃이다.


그럼, 저면관수인지 뭔지 화분에서 사달이 난 나팔꽃 모종들을 위 아이처럼 방치만 했을까? 아닙니다요, 안타까운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부를 일반 화분들에 더부살이시켰다. 예상대로 흙에서는 더부살이 주제에 눈치도 안 보고 잘자랐다.

부겐벨리아 나무를 칭칭감은 아이들, 요즘 매일 두세송이씩 피고 있다.


물 건너온 귀한 제주도 하얀 나팔꽃은 포인세티아 화분에 모종 두 개를 옮겨놨었는데 두 그루? 에서 딱 세 송이 꽃을 피웠다.

씨를 받기 위해 끝까지 관리 모드가 필요하다.


​그나마 올여름 꽃 농사의 대박은 풍선초다.

얻은 씨앗 네 알이 모두 발아되어 베란다 바깥 난간에서 무섭게 넝쿨을 자아내며 위로만 올라갔다. 처음 심어본 거라 위로만 향해 가는 줄 몰라, 난간 대을 넘긴 이후에는 매일 이 아이의 공중살이를 도우기 위해 고민해야만 했다.

화훼용 철사로 그나마 해결을 했는데,

여러 기이한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름 따가운 햇살과 폭우를 견뎌낸 강도를 가지고 랭킹을 매기자면 단연 풍선초가 1위다. 더 이상 잡을 것이 없어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는 넝쿨들의 몸짓에 함께 할 수 있는 거라곤 지켜보는 것 밖엔 없지만,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생겼지만,

대신할 수도 도울 수도 없는 우리의 관계. 그러나 사실 풍선초는 나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다.

옆 방충망까지 이용해 기어이 풍선을 매달았고, 여전히 모진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끄떡없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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