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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l 31. 2022

소설처럼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루마니아 편


저지대/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저지대> 2009 노벨문학상 작가 헤르타 뮐러의 단편집으로 1982 루마니아에서 출간되어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데뷔작이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 루마니아에서 출간되기까지  작품이 누락되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노벨문학상을 받고서야 온전한 모습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표제작인 저지대만 중편에 가깝고 나머지 18편은 짧은 글들이다.  이야기들은 특별한 스토리가 있기보다는 루마니아 시골에 모여사는 독일계 소수민족 마을 슈바벤 사람들 일상이 어린아이 시선으로 묘사된다. 표현들이 함축적이고 우회적, 상징적이라 집중하지 않으면 길을 잃은 것처럼 헤매게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자주 일어났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에는 생생한 묘사가 압도하는 아름다운 문장들 앞에서 이번엔 계속 음미가 되어  앞으로 돌아가 읽고  읽게 된다. 지난달 헝가리 작가 아고타크리스토프의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동구권 특유의 암울함과 정제되지 않은 섬뜩하고 기이한 아름다움이 닮았다고나 할까.


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시’라고 할 정도로 음울하고 비루한 현실이 시적 언어로 승화되어 환상의 세계 어디쯤에서 작가의 시선은 구부러진다. 진실도 희망도 아닌.

길을 걸으면, 망치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망치 소리는 울려 퍼지고 또 울려 퍼진다. 이 울타리가 저 다른 울타리에게 그 소리를 전해준다. 울타리 사이를 걸어 다니면, 공기가 파르르 떨고 풀이 파르르 떨고 파란 자두들이  나무에 대고 숨을 내쉰다. 그리고 한여름이면 어머니는 여전히 뼈 빠지게 일을 하고, 할머니는 양귀비에 매달려 거의 꼼짝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젖소를 돌보고 못을 박고, 아버지는 어제 마신 술기운에 취해 오늘 또 술을 들이켠다. <저지대> 중


밤이 자동차 위의 궤짝들을 날름 먹어치우고, 궤짝 안의 채소들을 날름 먹어치운다. 산속에서 토마토 냄새가 집에서보다 더 강렬하다. 케테 언니는 팔도 없고 얼굴도 없다. 언니의 손이 내 차가운 무릎을 따뜻하게 쓰다듬는다. 언니의 목소리가 내 옆에 앉아 있는데도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입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말없이 입술을 깨문다. - <썩은 배> 중 -


길가에 널브러진 사금파리 한조각도 뭇 생명들과 어우러지면 살아 숨 쉬어, 잠자고 있는 온 감각을 깨운다.

마을 변두리에 낡은 살림살이들이 버려져 있다. 밑이 빠지고 우그러져 폐기 처분된 냄비, 녹슨 양동이, 판때기가 깨지고 밑받침이 떨러 져 나간 화덕, 구멍 숭숭 뚫린 난로 연통. 밑이 빠진 세숫대야에서 풀이 자라나 노랗게 빛나는 꽃을 피운다. 벌레가 씁쓰름한 스피노자자두를 갉아먹고 파란 자두 껍질 사이로 무색의 즙을 토해놓는다. 우거진 덤불 속의 이파리들이 숨이 막힌다. 길고 뾰족한 가시로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빛을 찾아 구부러진다. - <저지대> 중 -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평면적인 현실이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빼곡한 문장들 사이에서, 문득 기시감까지 드는  부분은 오래토록 생각을 붙잡았다.

예전에는 마을에 뱀이 많았다. 뱀은 숲에서 강을 넘어 들판으로, 들판에서 텃밭으로, 텃밭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집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낮에는 다락방으로 통하는 계단 뒤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가, 밤이면 양동이 안의 차가운 우유를 마셨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이나 채소밭으로 일을 하러 갔다. 담요를 깐 버드나무 광주리에 아이들을 앉히고서 나무 그늘 아래 두었다. 그러고는 밭이랑에서 곡괭이로 풀을 뽑았다. 여자들은 숨을 내쉬고 곡괭이질을 하고 땀을 흘렸다. 그 여자는 마을 변두리에 살았다. 아이를 앉힌 버드나무 광주리를 나무 아래 두고는 채소밭에서 일했다. 광주리 옆에 우유병이 있었다. 여자는 감자밭에서 곡괭이질을 하다가 해를 올려다보았다. 땀 냄새가 났다. 곡괭이를 내려놓고 나무 아래로 갔다. 여자는 얼른 아이를 안아 올리고는 흐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여인이 풀밭을 비틀비틀 걸어가는 동안, 뱀이 광주리 안에서 풀밭으로 스르르 기어 나왔다. 몇 초 후에 여자의 머리카락이 허옇게 세었다. 채소밭에는 곡괭이가, 나무 아래에는 광주리가 그대로 있었다. 뱀은 우유를 남김없이 마셨다.  - <저지대> 중 -


채소밭, 아기, 광주리 그리고 ,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것들이다. 밭일이 얼마나 중했는지, 아니면 그렇게 해야만 다른 생활을 영위할  있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이유 없는 그저 생활의 단면   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밭매러 아이를 업고 갔다가 혹시 에서 뱀이 나올까  바구니에 담아두고 일을 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호미로 땅을 파면  올라오는 흙냄새가흙냄새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기였을 때부터 맡아 그런가라는 생각을 하기도잡힐  말듯한  이야기는 살아오며  특별한 이미지로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일이 일상이라 어머니는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고단한 일상으로 밤에도 잠을  잤을 것이다.


고단한 일상을 넘어넘어 그 아기들이 그때 어머니 나이를 훌쩍 넘겼는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몸에 좋다는 약초만 보면 늙은 아이들을 위해 캐고 다듬고 말려 보낸다. 보내는 정성으로 모두 건강하면 좋겠지만, 가장 애지중지하던 맏아들이 얼마 전에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먼저 죽지 못한 걸 애끓는 마음으로 통곡했지만 채매 예방하는 약을 먹어야 한다며 밥을 챙겨 드시더라. 눈물로 지새우지만 한의원도 가고 미용실도 혼자서 갔다.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듯 남은 늙은 아이들에게 쑥을 말려 줄 테니 꼭 먹어라 당부한다.


변두리에 살았다는, 뱀을 보고 몇 초 만에 머리카락이 허옇게 세었다는 소설 속 아이 엄마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 여인과 화자의 할머니는 현실의 누군가를 닮았고 내 어머니는 소설처럼 산다. 소설이 현실인지 현실이 소설인지 이쪽저쪽에서 구부러지고 구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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