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창덕궁 후원

이야기가 있는 집

by 여름지이


군산의 민병헌 사진작가는 길 가다 만난 오래된 적산 가옥을 수리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오늘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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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물질화된 영혼이라는 문구에 알맞은 집주인을 만나면 여전히 설렌다. 아직도 방송 중인 ‘건축 탐구 집’에서 또 다른 이를 만났다. 이번엔 젊은 남성으로 글을 쓰는 작가다. 궁궐 사이에 있는 마을, 북촌 토박이인 그는 궁을 일상에 둔 아이에서 궁을 꿈꾸는 어른이 된다. 그의 첫 소설 주제가 오래된 집에서 창덕궁을 내려다보며 글을 쓰는 친구들 이야기였다니, 궁궐은 이미 그의 내면세계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매번 쓰는 글 속에 일관된 흐름이 있다는 것을. 새로운 주제로 글을 써보려 애를 쓰지만 어느새 나의 내면 아이는 주인공이 되어있고 자연 속을 서성인다.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결국 그건 내 모습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북촌 아이였던 그는 원서동(창덕궁 후원 서쪽 동네 뜻)에서 궁궐에 대한 꿈을 실현했다. 골목의 막다른 집이자 창덕궁 후원 돌담에 붙은 오래된 집을 사서 꿈꾸었고 새로운 꿈이 시작될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사실 그 집은 세월을 감안하더라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허름하여 동네를 알던 모르던 선택의 여지를 둘 수 없을 정도의 겉모습이다. 증축의 흔적은 마치 덧댄 누더기 옷처럼 너저분했고 비가 새는지 지붕에는 비닐로 덮어 여러 개의 벽돌을 얹어놨다. 진행하는 건축가도 이런 집은 개보수 의뢰가 와도 손사래가 절로 쳐지는 집, 견적이 안 나오는 집이라고.

그래서일까. 젊은 집주인은 바깥은 아예 손을 대지 않았고 내부 수리만 친구들을 데리고 직접 했다. 몇 개월의 준비 과정은 있었지만 실행은 단 2주 만에. 벽을 부수어 방을 터고, 천정 서까래를 노출시키고, 창을 넓히고… 여느 전문가들 손에서 탄생한 깔끔하고 세련된 리모델링은 아니었어도 군산의 그 집처럼 세월을 지우지 않고 보존하며 특별함을 더했다. 겉과 속이 다른 반전 매력의 집은 그렇게 탄생했다.


개발시대 도시 주택가 좁은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스텐 철제 대문을 열면 좁은 마당이 나온다. 60~70년대에 유행하던 나무 격자 유리 현관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는 옛 건축자재들의 향연은 발 들인 누구나를 시간여행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중간 참에서 보이는 작은 창문 속 차경借境, 창덕궁 후원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걸려있다.


올라오며 맛보기처럼 본 후원 풍경은 툭 트인 2층 모임 공간에서 더욱 확장된다.

잠깐 저기 의자에 앉아 옛 시절 돌담 위 풍경을 상상해 보자. 하루 만가지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왕은 왕비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후원을 천천히 산책하고 있다.

여봐라, 지금 들리는 저 소리는 무슨 소리인고?

예에, 전하, 청딱따구리가 나무를 찍는 소리 옵니다.

그렇군, 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얼마 전엔 너구리, 담비도 보았는데, 여기 있는 모든 생명들이 귀하지 않은게 없고 배우지 못할게 없으니 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각별히 유념해 주길 바란다.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창덕궁 후원의 동물에 관한 어느 다큐를 보고 짧게 구성해 보았는데, 실제로 후원을 사랑했던 왕들의 생태적 마인드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여럿 있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왕대비 원빈은 침실에 뱀이 들어와도 빙그레 웃으며, 숲이 가까우니 괴이할 것이 없다,라고 했다니 구중궁궐에 갇혀있던 그들에게 후원은 각별한 장소였다는 걸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는 저 창문 너머가 출입이 제한 구역이라 사람보다는 동물 보기가 쉬울 것이다. 인적이 드문 진정 궁의 비밀 정원을 창문 뷰로 가지고 만 집주인의 눈썰미가 놀랍다. 글을 쓰는 집주인에게 이 공간이 상상의 보고인 만큼 나눔의 장소로 나아가려는 그의 계획도 이 집의 태생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후원은 북악산을 등지고 곳곳에 차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지대고 서쪽 담 안으로도 골짜기 물이 흘렀다니, 서쪽 담 바깥인 이 집터는 오죽 물이 많았겠나. 그래서 집이 들어서기 전에는 동네 우물터였다는데, 옛날 동네 우물가가 어떤 곳인가. 사람이 모이고 이야기가 만들어져 세상으로 흘러가는 출발지다. 이 터는 처음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이었고 그 동네 꼬마가 소설가가 되어 집주인이 된 건 어쩌면 운명의 수레바퀴가 처음부터 맞물려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어설픈 이야기꾼도 덩달아 엮어 본다.



집은 생물이 아닌데 사람 기운을 먹고 산다는걸 고향마을 빈집들을 보며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원서동 집이 알맞은 주인을 만나 마치 새 피를 수혈받은 것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이렇게 글을 쓸 정도로 흥분되는 일이라면, 더 이상 회생하기 어려운 허물어지는 집에 대한 애잔함도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풍경 앞에선 정말 한 채의 집이 삶과 죽음이 있는 유기체로 느껴져 저항할 수 없는 흐름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한때는 삼대가 살았을 정도로 꽤 큰집이었는데, 마치 모든 근육이 허물어져 오그라든 누군가의 주검처럼 소로의 한 칸 오두막처럼, 점점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 앞에서 너와 나의 경계는 무너진다.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시간은 오히려 사물의 변화를 통해 얻어내는 추상성이다 등, 잡히지 않는 시간에 대한 말들을 오래된 것들을 보며 꼽씹어 본다.







*ebs <건축 탐구, 집> - 이상하게 끌리는 집 편

* kbs 다큐 <자연의 타임캡슐> - 비밀의 정원, 창덕궁 후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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