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나라

# 6일째 - 프라이부르크 2 (보봉 마을 )

by 여름지이

눈을 뜨자마자 아침 산책을 나갔다.

1층과 연결된 정원 작은 쪽문을 열고 나가니 높은 그네가 매달린 너른 터가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니 트램 길이 나온다. 다시 돌아 반대편으로 가니 산책하기 알맞은 오솔길이 나오고.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니 이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이다. 어제 낮에 아이들이 놀고 간 흔적이 여기저기다. 돌 위에는 소꿉놀이 자연물이, 나무 위에는 물놀이하다 잊고 간 옷들이 주렁, 나무 그루터기 위에는 흙 묻은 남자아이의 앙증맞은 팬티가 납작하게 붙어 있기도 하다. 아이코, 아이들 모습이 상상되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개울가에 손 한번 담그고 두리번거리다 올라와 길을 다시 걸었다. 어디에도 '그러할 뿐', 손보고 다듬어진 곳은 없다. 세상에! 세상에! 외치지도 못하고 그저 맘속으로 감탄할 뿐이다. 태어나 쭉 개발시대만 살아온 난 지나가는 누구라도 잡고 왜 여기는 아직도 이런 지 묻고 싶어 졌다.

국민학생이었던 어느 봄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동네 아저씨들이 우리 집 울타리인 탱자나무를 톱으로 베고 깊숙이 박힌 뿌리를 빼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다음 날 높다란 시멘트 담벼락이 세워졌고. 더 이상 뾰족한 가시와 하얀 꽃, 땡땡 볼 같은 열매를 볼 수 없었다.

온 동네가 그랬다. 새마을 노래처럼 정말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그때 그 탱자나무 울타리가 얼마나 실용적이고 근사한 환경이었는지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고 많이 아쉬웠다. 가시가 도둑뿐만 아니라 빨래도 잡아주니까 엄마가 수시로 하얀 빨래를 널어놓았던 거구나... 아이들이 외갓집에서 찍은 사진이 탱자나무 울타리 앞이라면 더 좋았을걸.. 다시 탱자나무 울타리를 갖게 된다면 고무대야에 이불빨래를 질겅질겅 빨아 널어 상큼한 탱자 향이 배인 이불을 덮어 보고 싶다.


아이를 태운 자전거가 자주 지나갔다.

조금 더 가니 나무 가지로 얼기설기 만든 담과 문이 있는 유치원 같은 데가 나왔다.

숲유치원? 자연 유치원? 어슬렁거리다 입구 벤치에 애기를 보고 있는 할머니가 있어 먼저 '할로'하고 인사를 건네 보았다. 처음 만났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화가 되는 걸 보면 여자들의 수다에는 언어는 큰 걸림돌이 아닌가 보다. 지금 난 간곡히 말할 상대가 필요한지도 모르고. 자기는 뮌헨에 살지만 딸 집이 여기라 애기 봐주러 왔다고 했다. 어디 가나 친정 엄마들이란 ㅠ.

여기 자연도 좋지만 뮌헨도 못지않으니 꼭 들러보라고도 했고. 뮌헨의 노란 민들레?

아기가 할머니랑 있을 땐 칭얼대다가 얘기하는 동안에는 울지도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신통방통했다. 기념으로 할머니랑 사진도 찍고 근처 아이 아빠에게 부탁해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유치원 아이들과도 찍었다. 사진을 찍는다 하니 손을 살포시 모으는 아이들 모습이 재밌고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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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할로'를 한번 해 보니 용기가 생긴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할로'를 연발하며 지나갔다.

심지어 2층 베란다에서 어린 딸들에게 아침을 먹이고 있는 곳을 향해서도 '할로'를 외쳐 보았다.

딸들은 손을 흔들어 주는데 엄마는 놀라는 표정이다.

소심한 내가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

낯선 곳이 주는 자유로움은 기분을 들뜨게도 용감하게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눈치 볼 거 없이 무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누구에게나 말이 걸어 지니까.


아침 먹고는 아들이랑 본격적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보기 위해 나섰다.

우리나라 같으면 보호수로 지정되어야 될 것 같은 덩치 큰 나무들이 여긴 일상이다.

어디서나 그들 앞에선 겸손해진다.


여기저기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이 곳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패하고 1992년까지 프랑스군이 주둔하면서 '보봉'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을 갖게 된다. 독일이 통일되고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프라이부르크시에서는 싼 집을 얻으려는 서민들에게 공급할 새로운 주거 단지를 찾다가 마침 여기로 결정했고, 그러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보봉 포럼'까지 만들어 가며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한 결과 지금의 생태마을이 되었다 한다. 저에너지 집들(패시브 하우스..), 마을 주차장 지붕에는 태양광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이 쓰고 남은 에너지는 심지어 판매도 한단다. 에너지 자립의 좋은 예인 것 같다. 또 개인 주차장을 짓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 이 마을에 살 수 있다는데 정말 마을 안에서는 차가 다니는 걸 보지 못했다. 대신 오솔길과 나무가 살아 있고 너른 공간은 아이들이 맘대로 뛰어노는 놀이터, 공원으로 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런 환경이라면 누가 아이를 갖고 싶지 않겠는가. 동네 곳곳에서 젊은 아기 엄마들과 부모 대신 아이를 돌보는 조부모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전쟁과 해방 이후 우리가 나아가야 될 이상적인 사회를 그린 이원수 선생의 동화 <숲 속 나라>는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외세와 중앙집권에서 자립하고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꿈이 실현되는 곳, 자연과 아이들이 주인공인 곳, 아직 수동식 펌프가 살아있는 보봉 마을이 가고 있는 방향인 것 같다.


분명 여긴 생태적 삶을 살았던 시절의 모습뿐만 아니라 정취까지 남아 있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앤과 다이애나는 학교에 간식으로 가져온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숲 속 시원한 시냇물에 담가 놓는다. 우리도 동네 새미(우물의 방언) 가에 수박도 담그고 여름의 별미 열무김치 항아리도 담가 놨었다.

자연에 기대어 살았던 시절의 모습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진 않아도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어느 곳이든 비슷했으리라.

이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 옛날 서울 가는 기분으로 10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일찍 선진국이 된 이곳에 와보니, 우리가 애써 선진국 된다고 잃어버리고 잊고 있었던 게 여긴 여전히 살아 있다.


오후에는 구시가지 쪽을 나갔다.

먼저 점심을 먹기 위해 어느 블로그에서 본 '마켓 홀'이라는 델 찾아갔다.

대중화된 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푸드코트 같은 곳이었다.

개운하고 간단한 집밥을 선호하는 사람이 바깥 음식을 계속 먹어야 되는 상황은 정말 고역이다.

음식이 사람을 우울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행히 여기서 먹은 해물 토마토 스파게티와 치킨카레가 입맛에 잘 맞아 오래간만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정말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배를 채운 뒤, 아들이 머물게 될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알쓸신잡에 나온 자연사박물관엘 갔다. 그런데 기대했던 대학 캠프스가 우리나라처럼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도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냥 몇 군데 둘러보다가 잔디밭에 앉아 쉬었다. 여기 젊은이들처럼.

자연사 박물관은 tv에서 본 거 확인하러 간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확인할 만했다.

지금의 독일, 특히 프라이부르크 같은 생태도시가 있기까지 교육과 사회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

보여준, 아이들에게 생명, 환경에 대한 가치를 심어주기에 친절하고 재밌는 장소였다.

1층 작은 곤충들 이야기부터 시작해 맨 마지막층 파괴된 지구 환경 때문에 위기를 맞은 소수 부족들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지구 생명들 각각은 정말 다윈의 생명의 나무 중 한 가지일 뿐이라는 게 절로 느껴진다. 어떤 종이 우등하고 어떤 종이 열등할까?

나무가 뿌리 채 뽑힌다면 그저 모두 사라질 뿐이다.


*서쪽 마녀가 죽었다(나시키 가호/비룡소/2009)

숲 속 나라(이원수/웅진닷컴/2003)

빨간 머리 앤(루시 모드 몽고메리/시공주니어/2008)

뭰헨의 노란 민들레(김영희/고려원/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