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다 우연히 발견한 광고지에서 벼룩시장이 보봉 마을 근처에서 오늘 열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럽 벼룩시장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서 열린다니 열 일 제쳐두고 가 볼 일이다.
열 일도 없으니 꼭 가야만 하고 갈 수밖에 없다.
오후 일정을 마치고는 국경 넘어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날이라 아침부터 마음이 좀 바빴다.
마음이 바쁘니 걸음걸이도 빨라진다. 보봉 마을과는 분위가 좀 다른, 뭐랄까, 중산층 타운하우스 동네 같은 번듯한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당이 널찍한 주택들이 많았는데 말로만 듣던 독일 남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누가 독일인 사위를 봤는데 처갓집에 와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수리하고 고친다는 것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정말 골목마다 장비를 든 아저씨들이 울타리를 정비하고 잔디도 깎으며 집을 유지 보수하고 있었다. 아파트 문화인 우리에겐 흔하지 않은 풍경인지라 사람 구경도 하고 집 구경도 하면서 지나갔다.
꽤 걸어 지정된 장소인 동네 체육센터 근처 너른 공터에 들어서니 막 마켓이 시작되고 있었다.
느티나무 네 그루가 만든 그늘 아래 펼쳐진 이국적인 모습은 블로그나 잡지에서 유럽을 꿈꾸게 만드는 사진 속 풍경 바로 그것이었다. 그 풍경 속으로 나도 들어갔다!
책, 온갖 생활용품, 그림, 가구 등.... 별의별 물건들이 길바닥에 날 좀 가져가시오 말을 하는 듯 사뿐히 앉아 있었다. 일 년에 딱 두 번 있는 행사라는데 하필 내가 왔을 때 열리다니, 이런 행운이~.
처음에는 보는 것마다 너무 싸고 좋아서 눈이 정신없이 뱅글뱅글 돌아갔는데 막상 사려고 하니 가져갈 일이 걱정되었다. 여긴 우리 동네가 아니지 않나! 누구는 따로 물건 사갈 캐리어를 하나 더 가져오기도 한다지만 계획하고 오지 않은 난 그림의 떡인 게 많다. 엔틱 시계... 정말 사고 싶었는데 부피가 커서 안타깝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에서 온 티팟과 독일산 앙증맞은 딸기 그림이 있는 에스프레소 잔 3개, 오래된 그림책 2권에 만족해야만 했다. 티팟과 잔을 뒤집어 보니 놀랍게도 누구나 알만한 명품 브랜드였다. 한국에서 가끔 한 개씩 구입하는 엔틱 제품에 비하면 그 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쌌고 책도 어제 시내에서 산 것보다 더 오래되고 저렴했다. 가방까지 들고 와서 시계를 사 간다? 업자도 아니고 과도한 욕심이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싶다면서 견물생심이라고, 보면 못 사서 안달이니....
그 장소를 벗어나니 제정신이 돌아온다.
어쨌든 가방이 좀 무거워지게 생겼다.
아들은 별 관심 없는 장소인 데다 짐꾼 노릇하는 게 이제 슬슬 권태가 오는지 얼굴에 짜증이 서려 있다.
날씨도 덥고 왔던 길을 다시 걷기가 엄두 않나 버스 타고 가자했더니 기막혀한다.
목도 마르고 당도 떨어져 근처 가게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페트병을 자판기 같은 기계에 한 개씩 집어넣고 있다. 개당 돈을 돌려받는다 한다. 저렇게 하면 누구나 페트병 관리를 잘할 것 같다.
입에 하드를 하나씩 물고 도로가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달달한 게 들어가니 서로 기분이 좀 풀어진다.
숙소로 돌아왔더니 집주인 아저씨도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인사하고 순한 개 '티미'의 배웅을 받으며 11시 45분경에 체크아웃하고 나왔다.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2박을 하고 프라이부르크로 다시 돌아오겠지만 그때는 다른 곳에서 잔다.
역에 캐리어를 유료로 보관하고 버스시간까지 각자 따로 프라이부르크 구시가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아들한테 의지하는 건 난데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자유롭고 홀가분하다.
아들은 얼마나 더 그럴까.
혼자 시내를 어슬렁거리다 가려고 한 박물관 근처 나무 밑 벤치에 앉았다. 한번 앉으니 일어나 지지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허리를 뻗고 그냥 누워 버렸다. 휴우~, 근데 이렇게 편할 수가... 일정의 중반을 넘어선 여행의 피로감일까? 아침부터 서두르고 땀 뺀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차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귓가에 쟁쟁거렸지만 방해되는 것은 없다.
파란 하늘과 반짝이고 일렁이는 초록 초록 나뭇잎, 너무 시원하고 편안해 빈곤 속에 풍요 같은 행복감이 떼를 지어 몰려오는 듯했다.
'어이, 아줌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언젠가 강남 선정릉 입구 벤치에 누웠다가 이런 말 들어 봐서 하는 말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그들을 모른다. 자유로움은 외로움을 동반한다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유로움만이 가득하다. 왜 낯선 곳에서 고생 고생하며 이 느낌을 누려야 할까? 그건 누려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노상에서 안방처럼 휴식을 취하고 나니 박물관 돌아보기가 훨씬 편해졌다.
지하 특별전시관에는 '검은 숲'을 주제로 그림,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검은 숲은 독일어로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 숲에 햇빛이 들지 않아 검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하니 울창함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된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계모의 꼬임에 빠진 아빠가 아이들을 버리려고 들어갔던 숲 속이 여기라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었다. 그림 형제가 독일의 민화를 수집해 구성한 이야기라니 이 지역의 이야기인가 보다.
예전에 본 어떤 BBC 다큐에서 서양사람들은 숲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우리 눈앞에 있는 숨겨진 세계이며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간여행의 무대이자 놀라움으로 가득 찬 곳이라 했다. 숲을 죽이는 것은 상상의 세계를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간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 끊임없이 야생을 갈망하게 되는 것일까.
숲에서 태어났으나 문명 아래 잃어버린 감각이 많은 인간은 회기 본능으로 숲(야생)을 상상하고 동경한다.
그래서 숲 속으로 들어가 보지만 이젠 길을 잃기 쉽고, 헤매는 과정, 즉 어려움은 가려진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해 준다.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곧 성장의 의미이니 숲에 가기 전과 후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가 여행을 꿈꾸는 마음도 숲을 동경하고 상상하는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꿈에 부풀어 왔지만 나이 들어하는 여행은 기쁨만큼 힘들고 고단하다. 기본인 자고 먹는 게 부실하니 다니는 게 힘들 수밖에.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왔기에 비행기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는 끊임없이 다니고 보고 느껴야 한다. 스스로 만든 감옥, 스스로 빠진 토끼 굴~. 그러나 돌아가면 가기 전 맹숭했던 그 삶이 또 얼마나 안락하고 소중한지... 우리는 현재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돌아올 수 있는 곳을, 돌아 올 곳이 있기 때문에 또 떠난다.
이야기가 탄생했고 여전히 가득한 검은 숲을 이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만국의 언어인 그림과 사진이 말을 해 주었다. 전시회 제목도 schwarzwald geschichten(검은 숲 이야기들).
첫 번째 그림이 눈에 쏙 들어왔다. 숲에서 어린 소녀가 맨발로 벌통을 보고 있는 뒷모습, 소녀처럼 난 영원히 어리고 길없는 숲에서 맨발로 걸어도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