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옆 오솔길을 걷는데 저 쪽에서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할머니가 오는 게 보였다. 갑자기 개들이 짖고 꼬리 치며 나에게 달려온다. 언제 봤다고?? 아니 반가울 수 없어 주인인 할머니한테 자동으로 '봉쥬르' 인사가 나왔다.
할머니도 미소 지으며 '봉쥬르' 한다.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덕분에 기분 좋은 산책길이 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을 만난다는 게 여행을 가장 여행답게 해주는 것 같다.
아무리 멋진 풍경 속에 있어도 그 속에 사람이 없다면, 잠깐이라도 인사 나눌 누군가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비록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일지라도.
새가 유난히 큰 소리로 울어 폰을 꺼내 음성 녹음을 했다.
김영하 작가 말처럼 정말 소리가 더 많은 걸 기억해 줄까?
글로도 사진으로도 표현하기 벅찬 이 아침 산책길을...
대충 머릿속에 이 곳 지도가 그려졌는지 아들이 호텔에서 웅거러 미술관까지 걸어갈 수 있다 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강을 따라 걸었다.
아들은 한국에 있는 여자 친구랑 연신 통화를 해대며 나를 앞세우고는 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다.
서로 멀리 있어 좋은 것 얘기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뭐가 저리 매번 심각하고 다툴일이 많은지... 하여튼 젊은것들이란? 구시가지 쪽으로 접어드니 이른 아침부터 한국 패키지 여행객들이 제법 눈에 뜨인다.
드디어 박물관 도착!
야외 뜰에 그림책 <세 강도> 속 세 강도가 금방 책에서 튀어나온 듯 각자 도구를 들고 우리를 반갑게? 맞이 한다. 1975년부터 스트라스부르에 기증해 온 작품들로 2007년에 개관했다는데, 그림책 작가로만 알고 있는 나에겐 낯선 작품들이 많았다. 만화, 광고 포스터, 그래픽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그만의 기발한 작품들이 가득했다. 특히 더 놀라운 건 토미 웅거러가 '에로티즘'의 대가일 줄이야 ㅎ.
지하에는 따로 19금? 작품들만 전시하는 방이 따로 있었다는 ~.
작가의 이런 면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찾아보니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낀 알자스 지방의 정체성이 순수함과 에로티시즘으로 그의 몸에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밑바탕이 되었다는 말도 있고, 스스로를 "파괴자"라 규정하고 "에로티즘"을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와 성의 메커니즘화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며 풍자했다는 말도 있었다.
어떤 정체성과 의도가 있든 간에 에로티즘 그림을 접해 본 적이 없는 우리 모자는 웃음이 삐질삐질 나오는 해학이 가득한 기발한 그림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들은 개구리들이 주인공인 그림집까지 한 권 샀는데 인도의 뭐, '카마수트라'에 나올법한 내용인데 너무 재밌고 신선하다나, 참~.
프랑스와 독일 국기가 소재가 된 그림 앞에선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이 느껴졌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편견과 선입견 앞에서 늘 파괴자였고 어린이의 순수함을 간직한 영원한 자유인~
웅거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타고 온 플릭스 버스를 다시 타고 마지막 여정이 기다라고 있는 프라이부르크로 향했다. 내일 검은 숲을 둘러보고 산 자락인 티티제 호수마을까지 같다오면 끝이다.
차창 밖으로 들판에 있는 작은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호수 주변 나무 그늘에 쉬는 사람, 수영하는 사람.... 여름 한낮 들판 가운데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참 낯설면서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들은 아직도 여자 친구랑 해결이 안 났는지 시간만 나면 계속 전화통을 붙들고 있다.
나도 피곤해 차 안에서 비몽사몽 꿈속을 헤매다 역 근처 버스 정류소에 도착했는데,
아들 쪽을 쳐다보니 아직도 같은 상황이.... 어이가 없어 말도 섞지도 않고 먼저 버스에서 내려 버렸다.
짐칸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마지막으로 묵게 될 숙소가 마침 역 근처라 터덜터덜 서로 말없이 걸었다.
앞서 걷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뒤돌아보며, " 내 가방! " 외치며 얼굴이 사색이 된다. 어?!
순간 내 등에도 아무것도 매여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고....
바보같이 둘 다 버스 안 위쪽에 올려두었던 백팩을 그냥 두고 내린 것이다!
아들이 걸어온 정류소 쪽으로 뛰기 시작했고, 난 그때까지 여기가 버스 종점이니 귀찮게 되었지만 다시 가방을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잠시 후 땀을 빨빨 흘리며 맨손으로 돌아온 아들 왈, "버스가 떠났데..."
어디로? "콘스탄츠라는데로".
두둥, 여기가 종점이 아닌 버스였다....
다행히 둘 다 여건은 캐리어에 있었고 내 가방엔 일기장 빼놓고는 사실 별게 없었다. 아들 게 문제였다. 낼 검은 숲 드라이브를 위해 차 렌트용 국제 면허증이랑 삼촌이 물려준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한국이라면 당연히 누가 가져가지 않는 이상 버스회사 분실물센터에 고이 보관되겠지만 여긴 독일, 이런 서비스가 엉망이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아까 돌아갔을 때 역시나 자기들은 모른다고 했단다.
길가에 서서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사항이 아닌 것 같아 일단 근처 숙소를 찾아 짐을 풀었다.
제일 비싼 에어비엔비 집이었지만 별 감흥이 없다.
좀 쉬면서 머리를 맞대다 다시 아들이 플릭스 버스 정류소로 가 매니저한테 사정을 얘기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우는 아이 젖 준다고, 엄마 여권이 거기 있어 낼 출국을 못하게 생겼다고 급박함으로 밀어붙였더니 마지못해 어디 전화를 하더라는 거다. 그러고 받아낸 약속은, 내일 그 차가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오는 오전? 시에 오면 가방을 받게 해 주겠다고. 버스회사의 서비스 규칙이 아니라 순전히 인정에 의한 결과였다. 참 어이가 없었지만 믿어보는 수밖에. 가방이 안 돌아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신없이 둘 다 똑같이 자기 가방을 두고 내렸기 때문에 서로 잘못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엄마는 원래 정신이 없는 사람이고 네가 그 가시나랑 전화질만 안 하고 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잖아'
저녁 무렵 자기도 켕기는 게 있는지 봐 둔 맥주집에서 기분전환 하자며 살살 꼬드긴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마지막 날이다.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나 싶었더니 결국 끝자락에 이런 일이~
지난 여행에서는 기차를 잘못 타 낭패를 당한 경험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 사건이 없으면 여행이 아니지, 결국 지나고 보면여행의 감칠맛은 이런 일 아니겠나...
마음을 추스르며 아들을 따라나섰다.
구시가지 브로이 맥주집이란 델 갔다.
입구부터 와글와글 마당 가득 사람들이 흘러넘쳤다. 동네 사람들? 여행객들? 이 여기 다 모여 있구나!
흥겨운 분위기가 절로 감염되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고는 알프스 소녀 차림의 명랑한 아가씨에게 맥주와 소시지, 짭짤한 프리첼을 시켰다. 독일 사람들은 거의 안주 없이 맥주를 마신 다지만 우린 안주 맛으로 먹으니까. 데쳐 나온 독일 남부식 하얀 소시지가 짜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