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사계
계절은 변하고야 만다. 긴 장마와 태풍, 작년 이맘땐 생각지도 못한 전염병이 창궐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을은 오고야 말았다. 여름 뒤에 어김없이 말이다. 다행이다. 이런 변화라도 없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 당연한 것들에 감사하게 되고 당연한 것들에 의심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지적 생명체인 인간은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어 늘 탐구하고 창작하여 지금의 문화를 만들었고 또 만들어가고 있다. 그 흐름 속에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계절의 순환은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감성에 기대는 예술 분야는 더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당장 음악을 얘기하자면 300년도 더 된 비발디의 사계 바이올린 협주곡이 떠오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안토니오 비발디(1678~ 1741)는 작자 미상으로 전해져 오는 이탈리아의 정형시 소네트에 곡을 붙여 음(音)으로 그린 풍경화를 만들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의 12곡 중 1~4번인 이 곡들은 그 시대에는 흔치 않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제목을 가졌다. 덕분에 사계절이 뚜렷한 극동지방에서 인기 있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명곡, 또 가장 지겨운 클래식곡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지하철역이나 전화 연결음으로 익숙해 웅장한 베토벤이나 부르크너의 교향곡처럼 전 악장을 집중해서 듣는 경우는 아마 드물 것이다. 하지만 바이올린 세계, 특히 바로크 음악에서 사계의 위상은 달라진다. 세계적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이름난 연주자들이 여전히 연주하고 변주하여 녹음하는 레퍼토리이며, 그들의 다양한 연주를 들으면 바로크 음악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곡인 걸 막귀인 나도 알아버렸다.
바로크 시대는 우리에게 익숙한 작곡가들(음악의 아버지 바흐, 어머니 헨델???)이 나오는 시기인데 기악곡에 제목이나 해설을 붙이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비발디 곡에는 사계 외에도 <바다의 폭풍> <밤> <애인> <귀염둥이> <불안> <안식> 같은 제목이 있었고 악보 곳곳에는 시구절을 적어놓거나 '잠자는 염소 치기', '짖는 개'와 같이 음악에 알맞은 묘사어들을 덧붙이기도 했다. 추상적인 음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였을까. 꼼꼼하고 공감각적인 이런 낯선 시도는 이후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작자 미상이라고 전해지지만 비발디가 직접 썼다는 설도 있는 가을의 시, 음악과 짝을 이룬 소네트를 옮겨본다.
1악장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수확의 기쁨을 축하한다.
바쿠스의 술에 취해 흥겨워지고 결국은 모두 깊이 잠이 든다.
2악장
모두 춤추고 노래하기를 멈추는 것은 평온한 공기가 가져다준 온화함 때문이요.
계절이 달콤한 잠을 즐기도록 사람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3악장
사냥꾼들 새벽에 나팔과 총을 들고 개와 함께 집을 나선다.
짐승들은 달아나고 그들을 쫓는다.
짐승들은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지치고 상처 입어 떨며 도망친다.
그리고 도망칠 힘을 잃고 죽고 만다.
진부하다고 생각한 사계를 소네트와 함께 전 악장을 음미하며 들어 본다면 색다른 감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른 비발디 협주곡집 중 가장 먼저 출판된 <조화에의 영감>에 들어있는 곡들도 가을 분위기랑 무척 어울린다. 독주 바이올린 한대와 소규모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간결한 음악은 쉼표를 찍고 싶은 날 들으면 알맞기도 하다. 학창 시절(그 시절엔 유럽 보이그룹이 인기였다) 외국 팝 음악에 열광하다 가요로 발을 들일쯤 찾아온 긴 휴지기, 를 끝내고 다시 접속한 음악이 생뚱맞게 서양 클래식이다.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가 있는 고전, 낭만주의 시대도 좋았지만 비발디를 선두로 바흐, 헨델, 코렐리의 바로크 음악은 호수를 앞에 둔 중세 유럽의 어느 고성에 조용히 데려가 잠기게 했다. 파이프 오르간과 소리 나는 실을 정교하게 뜯는 듯한 신경을 자극하는 젬발로 소리는 성스럽고 종교적이었지만 현악 4중주나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세속적이고 감각적이었다. 이 느낌이 얼추 맞았는지 알아차리고 보니 광고, 드라마, 영화에서 바로크풍 음악이 많이 들렸다. 보험, 자동차, 화장품 등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우아함으로 역동적인 이미지를 주고 싶을 때 비발디, 바흐 음악이 들어간 경우가 제법 있었다.
영화는 최근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ost 중 '믿음의 벨트'라는 곡이다. 부잣집 안주인 연교가 2층 계단을 오를 때 기묘하게 울려 퍼지는 곡인데 소름 돋는다. 무서워 소름 돋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저만한 음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황을 극대화시켰다. 완전 바로크풍이지만 왠지 이프로 모자란 것 같아 찾아보니 역시 기존의 곡을 삽입한 게 아니라 음악감독 정재일이 작곡한 것이었다. 영화가 정점을 찍을 때 작곡가의 인터뷰를 보니, 고민 끝에 바로크 음악을 가져왔지만 바흐가 들으면 이게 뭐냐고 할 엉터리 바로크 음악이라 했다. 음악을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운 적 없어 악보 구성을 잘 몰라 엉터리가 나왔다고. 다양한 음악 분야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활동하고 있는 그와 클래식을 영혼의 울림보다는 팝처럼 감각에 의존하는 내가, 우리(?) 서로 공유하는 사이가 된 듯한 그의 말은 이렇다.
바로크는 우아하고 감정이 배제된 것 같지만, 어떨 때는 슬프고 뽕짝 같은 멜로디도 있어요, 그러면서도 아주 정색하는 이미지가 있죠.
맞아, 정색하는 이미지... 비발디 사계가 여기까지 데려와 버렸네... 아무튼 이렇게 감각에 의존한 클래식 세계에 입문시켜준 각별한 곡이라면 좀 더 들어간 음악, 좀 더 깊은 사계절을 노래하는 또 다른 곡이 있으니, 낭만주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곡 <사계> 다. 열두 달에 해당하는 12개의 멋진 제목이 붙은 짧은 피아노 소품집인데 음악 잡지사에서 매달 어울리는 시를 선정하면 그에 어울리는 곡을 차이콥스키가 작곡했다. 1875년 12월에 시작하여 1876년 11월에 마지막 곡이 실렸다니 1년 동안 독자들은 매달 선물 받는 기분 아니었을까.
1월 화로가에서(at the fireside)
2월 사육제(canival)
3월 종달새의 노래(song of the lark)
4월 설강화(snowdrop)
5월 백야(midnight sun)
6월 뱃노래(barcarole)
7월 수확의 노래(song of the reapers)
8월 추수(harvest )
9월 사냥(the hunt)
10월 가을노래(autumn song)
11월 트로이카(troica ride)
12월 크리스마스(christmas week)
12곡 중 10월 <Autumn song 가을 노래>를 나누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데 전 곡을 다 들려주고 싶다. 우린 한 달만 살고 갈 존재들이 아니기에 살고 또 살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사계절을 누릴 자격이 있으니. 작은거라도 누리는게 미안해지는 요즘, 이 가을만은.
* 참고 자료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진회숙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평단문화사/ 이동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