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결혼하고, 어쩌다 아버지가 되고, 어쩌다 할아버지가 되었다.(내 딸은 어쩌다 애를 낳은 것이 아니다. 30살 즈음에 건강한 애를 낳겠다고 결혼하기도 전에 마음먹었으니)
그러나 어쩌다 죽고 싶지는 않다. 사실 죽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답답한 것이다. 어쩌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지만 마지막 순간은 선택하고 싶다. 모든 것 다 정리하고(그냥 쓸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가족들 손잡고,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다고 하면서 가고 싶다.
‘의사 조력 자살’이 답인데 왜 우리는 이런 제도 도입하자고는 안 하면서 검찰개혁이니 패스트트랙이니 하면서 악다구니 쓰고들 있는 것일까?
딸과 가까이 살다 보니 외손자가 태어나고 8개월이 되는 동안 정말 자주 만났다. 두 달쯤 전이니 6개월 된 손자를 안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윗집 사람과 큼지막한 골든 리트리버가 이미 타고 있었다. 순하기로 소문난 리트리버지만 손자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내 눈에 보인다. 자신보다 훨씬 큰 개를 난생처음 보고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큰 눈을 끔뻑거리는 개를 보자 손자는 눈을 돌려버린다. 두려움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마주하지 않는 것이다. 9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손자는 리트리버로부터 아예 고개를 돌리고 정말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확실히 두려움은 우리의 DNA에 각인되어 있다.
죽음의 공포를 피하는 제일 흔한 방법은 눈을 돌려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예 입에도 올리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죽고 누구나 두려워 하기에 우리는 죽는 방법의 토론 같은 것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예 잊고 산다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 씨가 된다며 무조건 피하는 것이다.
‘무조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