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이 있을 때 가야 한다.
쿠바는 여행 가기 힘든 나라임에 틀림없다. 거리 상으로도 북미 대륙에서 비행기 갈아타고 몇 시간을 더 날아가야 한다. 그래서 남미나 아프리카를 갈 수 있는 체력이 있을 때 가야 한다. 좋은 자연환경을 갖고 있지만 아직도 개발되지 않아 50년 전 아니 100년 전의 모습을 갖고 있는 곳이 많다. 어쩌면 그런 모습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쿠바를 가는 24시간 여정 중에 론리 플래닛 쿠바 편을 읽었다. 남한보다 조금 큰 면적에 1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백인이 65%이고 흑인이 10%이고 나머지는 물라토(혼혈)라는데 내가 본 쿠바 사람들은 혼혈이나 흑인이 훨씬 많아 보였다. 아마도 인구 조사할 때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신을 백인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쿠바의 원주민은 거의 전멸당했다. 스페인의 총칼에 죽기도 했지만 그들이 갖고 온 질병(특히 천연두)이 더 치명적이었단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흑인 노예들을 엄청나게(3백만?) 서아프리카에서 사 왔다.
인터넷 없이 여행 다닌다는 것은 이즈음 생각하기 힘들다. 전 세계 웬만한 숙소와 음식점에서 무료 와이파이가 있기에 굳이 현지 심카드나 도시락 와이파이가 없어도 다닐 만 한데 쿠바의 사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바나 도심의 공원 주변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만을 쳐다보는 진풍경을 보게 된다. 그곳이 바로 와이파이 존이다. 와이파이 존에서만 공용 와이파이에 접속할 수 있다. 보통 1 쿡(1달러나 1유로)에 구입하는 카드로 딱 한 시간 이용할 수 있다. 아바나 도심의 카드를 구입하는 곳에는 보통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일인당 3장 밖에는 구입할 수 없다. 카드의 아이디와 패스워드 번호를 입력하여 인터넷 접속이 되는데, 속도가 느려서 카카오톡 메시지 정도나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보안성이 떨어져서 내 아이폰 같은 경우에는 그마저도 접속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쿠바의 거의 유일한 외화 수입원인 관광산업을 위해 고급 리조트에서는 카드 구매에 제한이 없고 아바나의 큰 호텔들은 호텔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카드를 프런트에서 팔기도 한다. 쿠바의 민박집인 카사 중에는 인터넷 라우터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에는 카드 하나로 접속하면 카사 주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라우터 접속하여 함께 사용한다. 물론 속도는 더 느려지겠지만 한 시간에 1달러인 카드를 아낄 수 있다. 이런 끔찍한 인터넷 환경에 익숙해지는데 나는 한참 걸렸다.
익숙해졌다기보다는 포기하는데...
미국의 규제 때문인지 심지어 구글은 서비스가 되지 않는다. 15박 하는 동안 나는 학교 구글 웹메일을 열어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15일 동안 쌓여 있던 메일 중에 내 인생에 영향을 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매일 같이 학교 주소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메일은 열어 볼 필요조차 없는 스팸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 항공권 예약 같은 중요한 일은 학교 주소 메일이 아니라 구글 메일을 이용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샴푸 같은 세정제도 아주 귀해서 호텔이 아닌 카사에서는 비누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상점이라 해서 들어가 보면 진열대가 비었거나 두세 가지 물품 밖에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 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상점은 국영상점이고 배급품이 나오면 사람들이 줄을 선단다. 모든 것이 풍족한 잉여사회에 익숙한 여유 있는 관광객들은 이런 경제 시스템을 이해할 수가 없다.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사회, 바로 공산주의 사회를 쿠바에서 경험할 수 있다.
카사에서의 조식은 보통 5 쿡인데 American Breakfast 형태의 조식은 훌륭한 편이다. 생과일 주스와 생과일(파파야, 구아바, 바나나, 파인애플)이 나오고 커피와 빵에 달걀 요리가 나온다. 달걀이 이렇게 귀한 나라도 처음이다. 달걀이 하나였냐? 두개였냐가 카사의 평가에 중요하다. All inclusive 호텔의 조식은 뷔페식이라 달걀은 풍부하다. 그러나 주스나 과일은 카사만도 못하다. 쿠바에서 그나마 가성비 좋은 음식은 랍스터이다. 랍스터 정식이 10쿡내지 15 쿡에 제공된다. 굽거나 쪄서 나오는 랍스터를 관광지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렌터카 여행 중에 작은 마을을 지나치다가 피자집이 있길래 간단하게 피자로 점심을 해결할 요량으로 들어갔는데, 피자가 없단다. 오직 스파게티만 있단다. 소량의 치즈와 토마토케첩만이 뿌려진 스파게티의 소박함에 놀랐는데 계산하면서 가격에 또 놀랐다. 1 쿡이었다. 쿠바 현지 사람들이 외식하는 음식점에 우리가 들어간 것이었다.
대중교통 사정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바나 같은 도시에는 시내버스(중국에서 만들어진 버스이거나 30년은 된듯한 낡은 버스)도 다니지만 작은 도시들에서는 아직도 마차가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이렇게 많은 마차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 마차뿐이 아니라 자전거를 이용한 인력거도 아바나나 트리니다드에선 흔하게 볼 수 있다. 관광객이 이용하기도 하지만 주 대상은 현지인이다. 비날레스에선 전기스쿠터도 많이 보았다. 자주 정전된다고는 하지만 휘발유보단 전기가 더 싸고 믿을만한 에너지인가 보다.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 시절에 마피아들이 바라데로의 바닷가에 카지노와 호텔을 짓고 헬리콥터로 날아와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당시에 들어온 자동차들이 아직도 엄청나게 굴러 다니고 있다. 올드 카라 하여 쿠바의 명물이 되었는데 빨간색으로 도장한 오픈카들이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항상 어디서나 호객 중이다. 한 달 평균 월급이 30불이라는 쿠바 사람들에게 자동차는 엄청난 사치품이다. 굴러 다니는 올드카들은 엄청나게 비싼 생계수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자동차들은 T가 들어간 번호판을 달고 있는 렌터카들이다.
가끔 정전도 되고 호텔에 단수도 되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정말 불편한 나라. 1920년대의 빨간 올드카들이 냄새 지독한 배기가스를 뿜으며 달리는 나라. 파란 하늘과 구름이 정말 이쁜 나라. 하얀 모래사장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 나라. 폐허 같은 아바나 구시가지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에도 사람이 사는 나라. 그런 쿠바를 여행하기 매력적인 나라라고 나는 말 못 하겠다. 쿠바인이라는 호모 사피엔스 종이 이제야 자본주의에 눈떠가는 과정을 보고 싶다면 모를까...
애매모호하고 불편한 여행을 하고 나면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습관적이지만 편한 일상에 대한 고마움이다. 한국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떡볶이, 냉면, 돼지갈비, 그리고 초밥 및 생선회가 이렇게 맛있을 수 없다. 아침에 마시는 익숙한 맛의 커피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24시간 사우나가 주는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항상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지만 그 일상이 주는 진부함과 안락함도 큰 기쁨이란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