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함도 전통이 될 수 있다.
딸은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아들은 직장인 5년 차다. 가족 카톡방에서 누나가 남동생에게 묻는다.
딸: "우석아 너 생일인데 뭐 사주까?"
대꾸 없음
대꾸 없음
딸: "우석 아아!! 돈으로 주까?"
드디어..
아들: "관둬. 누나 생일 오면 내가 또 갚아야 하잖아. 우리 그냥 편하게 퉁치자!"
딸: “헐...”
1989년 7월생인 아들과 단둘이 저녁을 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들은 거의 말이 없다. 그러나 소주가 한 병쯤 들어가면 다르다. 아버지인 내가 자기 생일에 항상 외국에 나가 있었단다. 그래서 서운했단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교수인 나는 방학만 되면 배낭 메고 어디론가 떠났다. 내게 허용된 여름방학이 몇 번 남아 있지 않다는 초초함(?)에 방학을 특별하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이 내게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생일을 잊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캄차카에서 노르웨이에서 바이칼호에서 카카오톡 축하 문자는 보냈다. 심지어 지난번에는 생일선물로 카카오톡 송금도 했다. 그러나 아들이 서운했다니, 생일이 이즈음 뭐 그렇게 특별하냐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페북을 열면 오늘이 어느 페친의 생일인지 첫 화면에서 알려준다. 카카오톡에서도 오늘이 누구 생일인지 알려준다. 밴드 알림의 반은 여러 밴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일 알림이다. 알림이 궁금하여 오랜만에 밴드를 열어 보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밴드에 생일 알림만이 새끼줄에 엮인 굴비처럼 줄줄이 달려 있다. 이런 밴드 그냥 탈퇴해 버릴까 싶기도 하다. 어떤 밴드에서는 한 회원의 생일 알림에 수십 명의 회원 중 네댓 명은 생일 축하 댓글을 단다. 네댓 번의 밴드 댓글 알림이 내 짜증을 부른다. 밴드 회원인 대학 동기가 이런 생일 축하를 영혼 없는 축하라고 했다. 사실 생일을 기억할 만큼 가깝지 않다. 가족이나 연인 아니고서는 생일을 기억할 수가 없다. 컴퓨터가 기계적으로 알려주는 생일에 '쌩축'이나 이모티콘으로 댓글을 달아 축하하는 것을 난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가 이런 축하를 받을까 두려워 개인정보 공개에서 난 항상 생일을 비공개로 한다.
영혼 없는 축하인사는 또 있다. 생일날 아침이면 백화점, 쇼핑몰, 증권회사, 은행, 카드회사 등으로부터 영혼 없는 문자나 이메일이 도착한다.
난 아직도 까칠한 것이 틀림없다.
생일 축하의 역사가 궁금했다.
생일 축하는 지난 한 해를 무사히 살아남아 지금 실존함을 축하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호모 사피엔스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한 세상을 살아왔느냐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제3의 침팬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착한 천사' 등을 읽다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을 살던 사람들의 습관적인 행위가 전통이 되어 백세를 사는 세상에서도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달력의 역사 이후에 시작되었다.
일 년이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이고 달력의 기본이다. 인류의 탄생을 600만 년 전이라고 하면(아무도 모르지만), 인류가 탄생하고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600만 번이나 공전했다. 일 년이란 그중에 한 번이다. 달력의 시초는 청동기 시대의 수메르라고 하고, 현재의 달력은 로마 달력을 개선하여 1582년에 그레고리 교황이 정했단다. 성경에 기록이 있는 최초의 생일 축하는 이집트 파라오 생일 축하였고, 촛불은 그리스 시대에, 생일 축하 케이크는 근대에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류의 그 험한 역사에서 일 년이나 더 살았다는 것은 축하받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영혼 없는 축하인사나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라면 무슨 선물을 할 것인가는 큰 고민거리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으니 돈을 선물하는 것이 제일 좋고 편한 방법이다. 돈을 선물하는 것이 성의 없어 보인다고 아직도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받고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선 SNS 송금이 일상이 되어 많은 부의(조의금) 봉투의 전달이 훨씬 간편해졌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사이라면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선물 받고 싶다고 미리 말하자. 내가 무엇이 필요한데 그것을 당신이 선물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뻔뻔함이 진정 가까운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준다. 뻔뻔함이란 것도 자주 접하고 익숙해지면 습관적인 일상이 된다.
그리고 전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