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여행을 하면서 기록을 하셨다. 매일도 아니고 그렇게 꼼꼼하지도 않지만 감흥이나 생각이 떠오르면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 경관이나 환경을 사진과 함께 글로 남기셨다. 사진에는 포함될 수 없는 감격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한을 메모했다. 나는 지금 그 기록을 들고 아버지의 행적을 뒤쫓으며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실행하는 중이다.
모레노 빙하 트래킹은 엘 칼라파테의 가장 유명한 관광상품이다. 엘 칼라파테 시내의 거의 모든 여행사가 빙하 트래킹 상품을 파는데 열심이다. 당일 상품으로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한 회사가 독점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 소문도 있다. 아버지의 기록에 빙하 트래킹에 대한 소감이 있다.
모레노 빙하는 안데스 산맥의 동쪽으로 흘러내려 결국 아르헨티나 호수에서 생을 마감한다. 빙하 트래킹이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이동하여 아이젠을 장착하고 가이드를 따라 15명 정도의 그룹으로 모레노 빙하의 남쪽 가장자리 끝자락을 오르는 것이다. 빙하 위를 걸어봤다는 경험과 빙하 위에서 빙하 조각을 넣은 위스키 언더락을 제공한다. 빙하 위에서의 트래킹 시간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데 비싼 돈을 지불한 관광객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간혹 크레바스를 지나지만 위험한 곳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빙하 위를 걷는 것이 지겨울 때쯤 되면 빙하가 담긴 위스키 언더락을 빙하 위에서 만들어 무제한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마신 위스키 덕분에 몽롱해진 사람들은 아르헨티나를 환호하며 빙하 트래킹을 끝낸다. 아이젠을 벗고 산장 같은 오두막에서 형편없는 점심 샌드위치를 준다. 다시 배를 태워 떠났던 선착장으로 돌아온 뒤에는 빙하의 본류가 호수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 Mirador Perito Moreno로 이동한다. 빙하 트래킹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지만 이 곳을 다시 방문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흔쾌히 그 돈을 지불한다. 만약 내게 차가 있다면 Mirador Perito Moreno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수로 떨어지며 생을 마감하는 빙하의 임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임종의 순간은 보기만 해도 누구나 숙연해지니까. 2016. 1.25.
모레노 박사는 파타고니아를 탐험한 최초의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그의 탐험 역사는 파타고니아의 쓸만한 땅 대부분이 칠레가 아니고 아르헨티나의 영토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탐험한 공적으로 아르헨티나 호수로 밀려 들어가는 가장 큰 빙하에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구글맵의 위성사진을 보니 그 크기가 가늠된다. 특히 모레노 빙하는 그 이동속도가 빨라 임종의 순간을 쉽게 자주 볼 수 있어 유명해진 것은 아닐까?
어제는 엘 칼라파테 시내 산책 외에는 호스텔에서 뒹굴기만 했는데도 아직 시차극복이 완전치 않다. 모레노 빙하를 보고 오는 도중에 잠이 쏟아진다. 서울과는 12시간 차이니 서울은 지금 새벽 네시다. 아르헨티나 호수와 인접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에메랄드 빛이 나는 광활한 호수 앞에서 잠을 쫓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본다. 이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구글맵으로 편히 보아도 될 것을 굳이 내 눈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는 설마 내게 무의미한 경험을 유산으로 남기신 것은 아니겠지.
계속(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