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거니 Feb 04. 2021

스마트폰으로 남긴 유언

하루는 숙소에서 뒹굴고 하루는 모레노 빙하를 보는 사이 벌써 3박이 지나간다. 내일은 떠나야 한다. 피츠로이를 보러 엘 찰튼으로 가든지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든지 정해야 한다. 아니면 우슈아이아 방향으로 내 임무를 먼저 수행하러 떠나든지...


아버지는 여행노트도 남겼지만 유언도 길게 남겼다. 스마트폰 비디오 촬영으로 거의 한 시간 분량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녹화하셨다. 가족에게 유언을 녹화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솔직히 상상이 안 가지만 더 이상 자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한 모든 것을 정리하셨다. 대본을 미리 정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비디오에 담으셨다. 그동안 시간이 없고 기회가 없어 하지 못한 미안하다는 말뿐 아니라 재산의 상속문제와 심지어 본인의 장례까지도...


본인의 부고를 알릴 사람들의 명단과 영정 사진을 이미 출력해 놓았으니 어느 서랍에서 찾으라는 것과 심지어 영정사진을 둘러싸는 조화까지 지정하셨다. 국화는 싫고 자줏빛 장미와 하얀 카네이션으로 장식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빈소에는 미국 보칼 그룹인 마룬 5의 음악이 흘렀으면 좋겠고 문상온 분들에게는 치즈케이크와 아메리카노 커피를 대접해 주면 좋겠다는 말도 하셨다. 이런 황당한 장례식을 아버지가 초청한 문상객들은 예상하고 온 것 같았다. 상주인 내게 그들이 건네는 인사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가 진부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이런 황당한 상황이 이렇게 갑자기 오게 될 줄은 예상 못했다. 담당의사가 3년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고 했기에...


누나에게 일단 우슈아이로 먼저 가겠다고 카카오톡을 했다. 다음 숙소를 예약해 달라고. 엘 칼라파테에서 우슈아이아 가는 경유지인 리오그란데 까지도 자동차로 거의 열 시간인데 중간에 마젤란 해협을 건너는 페리도 타야 하니 하루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젤란 해협을 건너자마자 카톡 하면 적당한 숙소를 찾아볼 테니 일단 아침 일찍 엘 칼라파테를 떠나는 것이 좋겠단 문자가 왔다. 누나와는 거의 서너 시간마다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한다. 마젤란 페리의 시간표를 내게 보내주고 이 숙소 어떠냐고 내 의중을 떠보기도 하고 점심은 어디 가서 먹는 것이 좋겠다고 수시로 내게 알려준다. 난 누나에게 투정을 부린다. 한국음식점이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그러니 일본 음식점이라도 열심히 찾아달라고. 한국음식점이 없는 것이 누나 탓이 아니건만.


아버지의 여행노트에 리오그란데가 나온다. 리오그란데에서 우슈아이아 가는 길의 경치가 환상적이다 못해 몽환적이라고. 꼭 직접 운전하고 가야 그 맛을 알 수 있다고. 내일은 아침에 일찍 떠나야겠다. 리오 그란데에서 잘 수 있기를 바라면서 파타고니아를 종단해야겠다.


계속( to be continued)


이전 04화 Mirador Perito Moreno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