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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Feb 17. 2021

비글 해협

...


아침을 먹고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선착장 주변은 벌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선착장 옆 공원에 땅끝 표지판이 서 있다. Fin del Mundo. 표지판과 함께 사진에 찍히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난 사진 찍기에 큰 관심 없다. 과거 사진을 다시 돌아볼 기회나 시간이 없음을 안다. 살아내기도 힘든 세상을 살면서 지난 일들을 반추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읽은 책을 다시 읽거나 본 영화를 다시 본다거나 여행 갔던 곳을 다시 간다는 것은 헤어진 여자를 다시 사귀는 것만큼이나 아주 드문 일이다. 나 역시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살고 있다.


선착장 주변에는 비글 해협 관광을 알선하는 호객꾼들이 바쁘게 관광객을 물색하고 있다. 호객꾼 들을 무시하고 누나가 보내준 'Canoero Catamaranes'란 배를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얀색의 제법 큰 유람선이었다. 거의 구름이 없는 하늘은 더 이상 파랄 수 없는 색조를 띄고 있다. 관광하기에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날이다. 10시 정각에 배는 항구를 떠나 비글 해협의 동쪽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한다. 파도 하나 없는 호수 같은 해협을 물살을 가르며 달려 나간다. 비글 해협의 바다 한가운데에 동서로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선이 있다. 북쪽은 아르헨티나 남쪽은 칠레다. 남쪽의 나바리오 섬의 칠레 해군기지가 보인다.


해협 가운데 위치한 작은 돌 섬에 무인 등대가 있다. 등대 주변은 가마우지로 뒤덮여 있다. 까만 가마우지들은 가까이 다가서는 배와 관광객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배는 등대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속력을 내어 동쪽으로 내달린다. 배 이층 선실의 후미진 화장실로 갔다. 문 걸쇠를 채우고 까만 손가방에서 작은 삼다수 페트병을 꺼냈다. 페트병은 연회색의 가루 덩어리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페트병 표면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주조(casting)된 듯한 아버지의 분골 덩어리가 드디어 내 손에 쥐어진다. 차가운 작은 아령을 쥔 감이 온다. 천연성분의 접착제와 함께 삼다수 병에 넣어졌던 아버지의 잔해를 비글해협에 떨어뜨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다.


아버지는 가족납골묘에 안치되는 것을 거부했다. 화장하고 남은 분골(대부분 칼슘 옥사이드)을 이 곳 파타고니아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운이 좋으면 남극대륙 가까이 흘러갈 수도 있고,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온 바다를 떠돌고 싶다고도 했다. 파타고니아 가는 것이 쉬운 일 아니니 급할 것 없다고도 했다. 분골을 집에 오래 갖고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일본에선 분골을 집에 안치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나와 누나를 심지어 안심시키려 했다.


배가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오리털 파카 주머니에 분골 덩어리를 넣고 1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바위섬에 물개들이 가득 올라와 있다. 사진 찍느라 사람들이 배의 좌현 한쪽으로 몰려든다. 나는 담배를 무는 척하며 사람들과 떨어져 배 뒤편 흡연구역으로 이동한다. 우현 난간을 따라가다 작은 아령을 바다에 떨어뜨렸다.


남극대륙과 가까운 지구 반대편 바다에서 아버지를 보냈다.

https://youtu.be/SKi_4CNY7g4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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