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10여 년을 성남시 분당 정자동에서 사셨다. 매장이나 화장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공원묘원에 가족묘 할 자리를 마련해 두셨으니 화장을 생각하고 계셨다고 봐야 한다. 임종하시자마자 연락한 상조업체 장례지도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화장장 예약이다. 너무 이른 시간은 피하고 싶다 했더니 오전 10:30으로 예약했다. 오전 9시에 발인을 하고 성남시 화장장으로 향했다. 2010년에 장인어른 돌아가셨을 때 와보고 처음이다.
화장장의 정식 명칭이 '성남시 영생관리사업소.'
영생이란 Eternal life이고 기독교 용어 같은데, 영생을 관리하는 사업을 하는 장소라는 것에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이왕이면 환생도 관리하지. 10여 년 전에는 건물도 새것이었고 주차장도 여유가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다. 주변에 건물들도 많이 들어서 있고 주차장도 작고 붐볐다.
화장시설이 있는 건물의 입구는 관을 내리는 대형버스들로 붐볐고 아버지를 모시고 온 리무진도 한동안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화장 예약 시간에 맞춰 리무진에서 아버지의 관을 내렸다. 전동으로 움직이는 운반체 위에 관을 올리고 아버지는 화장로로, 유족들은 화장로 옆에 마련된 관람석으로 이동했다. 화장로마다 작은 관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관람석의 창을 통하여 아버지의 관이 화장로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예상시간은 두 시간. 10기가 넘는 화장로가 두 시간 반 정도를 주기로 바쁘게 작동하고 있다. 여기저기 통곡소리가 들린다.
화장이 끝나면 납골을 위해 천안까지 먼 길을 가야 한다. 일단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설렁탕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상중에 상주가 이렇게 입맛이 좋다는 것이 괜히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생각났다. 특히 그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식당을 나와 아버지가 화장되고 있는 화장로 앞 관람석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버지의 영정을 보며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여기저기에서 오열하는 유족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옆 방에서 엄마, 엄마 하며 여학생의 목놓아 외치는 소리에 내 마음이 심란해진다. 나도 이제 고아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고아'를 스마트폰에서 찾아보았다. 고아란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부칠 곳이 없는 아이. 성인을 넘어 어르신이 된 내게 고아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방 저 방에서 통곡소리가 쏟아져 나와 복도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니나’에 나온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한 연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흐느끼는 소리, 우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들이 어우러져 비슷한 이유로 각기 다른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마침내 아버지의 유골함이 내게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