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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May 02. 2021

부의금을 정리하며

부의금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어떻게 누구에게 알릴 것인가를 고민했었습니다. 일가친척이야 당연히 알리지만 사회에서 만나 알게 된 사람들은 무척 많습니다.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 직장인 대학교 동료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동문수학했기에 선배와 후배인 사람들...


부고 알림이란 짧은 문자 메시지를 이 나이(63)까지 살면서 워낙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임종을 그렇게 짧게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침대 옆에서 다섯 시간 이상 기다렸습니다. 임종 직후에는 퇴원 처리와 시신 안치를 위해 대기하는 시간도 제법 있었습니다. 동생과 이 모든 것을 함께 했기에 동생이 일처리 하는 동안은 저는 딱히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부고문( https://brunch.co.kr/@jkyoon/356 )을 브런치를 이용하여 작성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정리했습니다. 문상 오신 분들이 궁금해하실 만한 것들을. 그리고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분들이 문상 가도 괜찮으냐고 직접 전화 주셨습니다.


부고문을 작성하고 나니 누구에게 알릴 것이냐가 문제였습니다. 남녀노소와 친소 여부를 전혀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모든 분들에게 알릴 마음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상대방을 생각했습니다. 만약 상대방의 부친상 부고 문자를 받았을 때 문상을 안 가도 최소한 조의금을 보낼지가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각각 부고문을 보낼 시간은 없었습니다. 카카오 단체 채팅방( 대학 동기, 교회의 주차봉사위원회, 직장은 제가 속해있는 학과 교수님들, KAIST 실험실 선후배 )과 몇몇 친구들에게만 빈소가 마련된 오전 11시에 보냈습니다. 나중에 보니 보냈어야 하는데 임종을 지키느라 밤을 새워 정신이 혼미하여 빠트린 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 아버지와 함께 오래전에 두 번이나 골프를 함께 한 친구가 서운해했습니다. 보통 이런 부친상 문자 받으면 한 번도 부친을 뵙지 않았어도 문상 가거나 조의금을 보내는데 부친과 함께 골프까지 치고 오래(?) 묵혀 둔 공까지 선물 받았던 본인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빈소가 마련되고 상조회사 장례지도사와 미팅한 직후 동생이 지나는 말로 부의금 받지 말까 하고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잠깐 망설였습니다. 확실한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의금은 살면서 제가 했던 부의를 돌려받는 의미도 있습니다.


친구의 셋째 아이 돌잔치까지 챙겼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비혼식을 할 예정이니 그동안의 모든 축의금을 돌려 달라는 얘기가 인터넷에서 회자된 적 있습니다. 마흔을 넘긴 어떤 분은 그동안 자신이 했던 축의와 부의를 모두 합하면 중형차 한 대 값은 되고도 남는다면서 비혼 선언식을 하여 차도 바꾸고 명품 백도 하나 사고 여행도 가겠다는 글도 읽었습니다. 가족장으로 치른다고 알렸지만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어려운 시간 내어 많은 분들이 문상 오고 또 많은 분들은 카카오 송금과 계좌입금으로 조의를 표했습니다. 정리하며 보니 제 경우는 반반 정도였습니다.


저는 부고 문자를 받으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대니얼 카너먼의 시스템 1 생각, 즉 직관으로 결정 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시스템 2 생각, 즉 분석과 해석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문상 갈 것이냐? 몇 시에 갈 것이냐? 혼자 갈 것이냐? 아내나 친구와 함께 갈 것이냐? 문상 못 가거나 안 가도 면피가 가능하냐? 그리고 부의금을 얼마 할 것이냐? 이 나이에 5만 원은 아니고 가장 많이들 하는 10만 원을 할 것이냐? 아니면 20이나 30을 할 것이냐? 그 이상을 할 것이냐? 사실 머리 아픈 문제입니다. 인생은 이런 문제들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러한 문제에 확실한 답을 주는 인공지능은 결코 개발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바로 결정하고 송금하고, 편하게 다른 문제로 넘어가는 분들도 많겠지만, 저는 쉽게 결정되지 않으면 보통 하루를 묵힙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놓아두면 24시간 이내에 보통 제가 바라던 답이 결정됩니다.


부의의 크기와 부의금의 액수가 비례하느냐?

축하의 크기와 축의금의 액수가 비례하느냐?


자본주의에 살면서도 마음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불편을 느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불편한 마음이 너무 커서 청첩장이나 부고 문자를 보낸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마음도 많이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얼마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제 부친상의 부의금을 정리하며 확인한 것은 가까움의 정도와 부의금 액수의 상관계수가 1에 아주 가깝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변수는 경제적인 수준과 사회적인 위상입니다. 시쳇말로는 체면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이 나이에 5만 원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에 해당합니다.

 

결국 부의금의 액수는 자신의 사회적 위상과 상대방과의 친소관계를 보여줍니다. 간혹 예외가 있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데이터 분석에서 쉽게 마주치는 데이터 오류로 치부할 수 있을 만큼 적습니다.


저는 개인 비즈니스 없는 은퇴를 앞둔 대학교수라 이런 분석이 가능하지만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은 비즈니스의 중요도와 가능성 등이 오히려 크고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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