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희망을 품다.
일요일 저녁 7시 평창의 오토캠핑장에 혼자 남았다.
간간이 안개비가 뿌리지만 아직 해가 제법 남았다. 비 오는 토요일 어제저녁에는 캠핑장이 꽉 찼었다. 일요일 낮에 사람들은 텐트와 짐을 챙겨 거의 다 떠나고, 서너 개 정도의 텐트들만이 쓸쓸히 일요일 밤을 기다리고 있다. 텐트 옆 캠핑의자에 홀로 앉아, 어제 남긴 와인을 홀짝거리며, 비구름 사이에 남은 여명을 혼자 음미하고 있다. 정말 여유롭다. 나는 이런 여유를 즐기고 있다. 3년 전에 노르웨이에서 렌터카 타고 혼자 여행하다 지나쳤던 캠핑장 같다. 공동부엌, 화장실, 샤워실 모두 넓지는 않지만 깨끗하게 유지되어 사용할 만하다.
일주일 전이었다. 딸이 토요일 가족 캠핑을 위해 캠핑장을 예약했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두 돌이 지난 손자 도민이를 누군가 항상 보고 있어야 하기에 세 가족만의 캠핑을 하기는 무리라 생각된다며. 그런데 함께 캠핑할 사람이 없단다. 손자와의 캠핑은 새로운 경험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는 도민이만 좀 봐주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텐트 치고 일박하고 텐트 걷어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바쁘고 성가신 것인지 해봐서 안다. 그래서 캠핑장을 하루 더 연장하라고 했다. 나 혼자 일요일 하루 더 자고 월요일 친구들과 골프 치러 바로 가겠다고. 그리고 난 지방에서 내차로 캠핑장으로 바로 간다고.
토요일 밤에는 비가 엄청 내렸다. 딸네 가족은 SUV에서 차박을 하고 나는 혼자 텐트에서 자기로 했다.
"도민아, 엄마 아빠는 차에서 자고 도민이는 할아버지랑 텐트에서 잘래?"
"왜?"
"할아버지 혼자 자다가 밤에 귀신 나오면 무섭잖아. 무서우면 도민이한테 딱 붙으려고. 도민아 구해줘 하면서."
"싫어. 나는 엄마랑 잘 꺼야!"
"할아버지랑 자자. 귀신이 할아버지 물어가면 어떡해?"
도민이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젓는다. 할아버지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이 부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엄마랑 떨어져서 잘 수는 없는 것이다. 도민이가 좀 더 커서 엄마 아빠랑 떨어져, 할아버지와 둘이 어딘가로 멀리 떠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맺고 싶다. 그만큼 할아버지가 믿을 수 있고,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도민이에게 인식되고 싶다.
그날 밤 텐트에 귀신이 정말 나왔다.
물에 떠내려가는 꿈을 꾸다 새벽 네시 반에 깼다. 텐트 안으로 빗물이 스며 들어와 깔고 잔 스펀지 매트리스가 푹 젖어 내 등과 엉덩이가 축축하다. 물에 떠내려가던 것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물귀신이 나온 것이다. 5시 18분이 일출이지만 이미 하늘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텐트 밖으로 나와 타프 밑 캠핑의자에 앉았다. 빗줄기는 좀 잦아들었지만 전 날 오후 4시부터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여름 캠핑의 최대 방해꾼인 벌레들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일요일 오후 근처 고깃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딸네 가족은 서울로 떠나기로. 캠핑장에는 내가 잘 텐트와 월요일 아침식사를 위한 약간의 장비만을 남겨둔 채 사위와 딸은 오후 내내 짐을 챙겼다. 고깃집에서 떠나기 전 화장실을 다녀온 딸이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자연스럽게 자발적인 허그를 한다. 비 오는 캠핑장에 아빠만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내심 불편한가보다. 오랜만에 딸을 안아보는 나도 왠지 코끝이 찡하다. 이런 느낌이 좋다. 살아 있다는 느낌, 그리고 나를 걱정하는 딸이 있다는 확신.
집 떠나면 고생이다. 캠핑은 고생이지만 새로움을 느끼고 관계를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다. 손자와 단둘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 생겼다. 절망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무망이 무서운 것이라는데 난 오늘 새로운 희망이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