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다리는 인생이 될까 겁난다.
드디어 캄차카 반도의 제일 중심도시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츠키에 도착했다. 페트로는 베드로이고 파블로프스크는 사도바울이다. 그러니 이도시의 이름은 캄차카의 베드로와 바울이다. 이 도시에 접근할 수 있는 도로나 철길이 없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았다. 오직 비행기와 배로 드나들 수 있다. 캄차카 반도도 대한민국처럼 섬 아닌 섬과 같은 꼴이다. 이 곳에는 옛 소련의 핵 잠수함 기지가 있던 곳이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옛 소련 시절에는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이었고 소련이 개방된 후에도 이 곳이 외국인에게 개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바로브스크에서 탄 비행기에서 구름 위로 봉긋봉긋 올라와 있는 화산 봉우리들을 보았다. 봉우리들은 아직도 하얀 눈을 이쁘게 뒤집어쓰고 있다. 지도에서 보면 이 곳 아바차만이 왜 핵잠수함기지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일대에 이렇게 큰 천혜의 항이 여기 말고는 없다. 아바차만을 선회하며 내려온 비행기는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옐리조보공항에 부드럽게 사뿐히 내려앉았다. 확실히 러시아 조종사들의 실력이 좋은가 보다. 국내선이라 그런지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 버스를 태우더니 공항청사 옆 출입문에 바로 내려준다. 청사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그냥 나가란다. 꼭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 기분이다.
공항 앞 광장에 서너 대의 택시가 서 있다. 자 이제 누구와 흥정할 것인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 가장 험악하게 생긴 택시운전수에게 다가가 호텔 예약 종이를 보여준다. 마침 러시아어로 프린트되어 있다. 어릴 때 여드름 때문에 엄청 고생한 듯한 운전수는 호텔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How much?" 하며 엄지와 검지를 눈 앞에서 비볐더니 주머니에서 러시아 돈뭉치를 꺼내 1200 루블을 만들어 보여준다. 깎고 자시고 없이 오케이하고 바로 택시에 올랐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 도요타 코롤라 웨건이다. 러시아의 많은 승용차가 일본에서 중고차를 수입한 것 같다. 어젯밤에 인터넷에서 캄차츠키 공항에서 시내 들어가는 방법을 찾았는데 마땅한 정보가 없었다. 전 세계의 모든 공항, 항구, 터미널 등에서 원하는 장소까지 택시나 밴을 서비스하는 사이트가 있었다. 소위 픽업과 센딩에 전문화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지금의 이 상황(옐리조보공항에서 내가 예약한 Geyzer hotel)을 입력하니 4200 루블이었다. 10분 뒤에는 이 가격이 바뀔 수 있다고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며 바로 카드로 계산할 것을 압박하였다. 아무래도 너무 비싼 것 같아 안 하고 그냥 오길 잘했다. 캄차카가 더 좋아지기 시작한다.
사실 나이 들수록 이런 상황에 마주하기가 싫어진다. 그냥 비싸더라도 누군가가 마중 나와 주기를 원한다. 환경적응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다. 적응력이 떨어진다기보다는 적응하겠다는 의지가 떨어지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가 부담스럽다. 변화가 싫은 것을 우리는 '보수'라고 한다. 그래서 나이 들면 보수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나도 말도 안 되는 그녀를 대통령으로 찍었다.
욕실 구조가 우리와 다른 나라의 욕실에서 씻는 것이 부담스럽다. 비데가 없는 화장실에서 화장하기 싫어진다. 침대 없이 바닥에서 자는 것이 불안하다. 내 목에 딱 맞는 베개 없이 잠을 잘 수 있을까 걱정된다. 열악한 교통인프라를 가진 나라(인도나 라오스)를 여행하기 싫어지고 영어가 안 통하는 나라(중국이나 러시아)를 여행하기는 불안하다. 나이가 들다 보면 이미 많은 것들을 다 해봤다. 그렇게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마주하기 힘들다. 좋은 경치 멋진 경치도 많이 봤고 또한 그런 사진들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중늙은이를 감동시키거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다 보면 점점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에 마주하기 싫어서 집에만 있게 될 것이다. 매일 가는 곳만 가고 매일 하던 것만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이 될까 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