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worfenheit
실존주의에 흠뻑 빠졌던 적이 있다.
1977년 대학교 1학년 윤리시간이었다. 당시의 박정희정권은 유신이후에 대학생들에게 윤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였다. 윤리를 가르치던 교수님은 철학전공에 틀림 없다. 거의 대부분의 강의시간을 땡땡이 치던 그 시절에 내가 왜 재미없는 윤리시간에 앉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어쩌다 들어간 것임에 틀림없다.
'Geworfenheit'
영어의 'throw'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가 'werfen' 이다. werfen은 warf geworfen 으로 소위 동사변화를 한다. 과거분사인 geworfen은 우리말로 하면 '던져지다' 이다. 거기에 명사형으로 만드는 heit 란 접미사가 붙었다. 결국 Geworfenheit 는 번역하면 '던져진 존재' 이다. 우리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해석처럼 하나님의 쓰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나 어떤 용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자유를 얻어내는 것이 정말 어려울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꼭 39년 전이다. 그 강의 내용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 다들 엎드려 있거나 다른 책을 보고 있었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대학 일학년 대형 계단식 공동강의실에서 그 철학교수님은 혼자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우리가 모두 던져진 존재라고...
아직도 그 교수님의 격한 독일어 발음이 생생히 들린다. 그래서 선생님은 열정을 갖고 가르쳐야 한다. 잔소리가 아닌 열정이 철 없는 학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은 어렵지만 실존주의 문학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소위 실존주의 문학작품들을 찾아서 읽었다. 유명한 고전인 '어린왕자'를 쓰고 지중해 연안 정찰비행중 행방불명되어 시신도 찾지 못한 생텍쥐페리, 폐병으로 요절한 프란츠 카프카, 자동차사고로 죽은 노벨상 수상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들을 읽었다. 그 당시의 나는 아직 사춘기를 넘지 못한 대학 일학년이었다. 집구석을 탈출하여 혼자 살고 싶다는 욕구를 아무데서나 표출하는 철 없는 소년이었다. 고독을 씹으며, 아니 고독을 즐기고 싶었다. 중학교 2년에 운명적으로 마주한 새엄마와의 관계도 이미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태였고, 믿음이 가지 않는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그저 혼자 살수만 있다면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텐트와 배낭메고 설악산으로 갔다. 나는 자유를 갈망하는 던져진 존재라고 확신하면서...
나는 터키의 쿠데타 속에 던져졌다. 다행히 대한항공이 아닌 아시아나항공으로 던져져서 쿠데타 현장이었던 아타튀르크 공항을 쿠데타 발생 두시간 먼저 빠져나와 대한항공으로 던져진 승객들처럼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쿠데타가 난지도 모르고 곯아 떨어졌다가 새벽 폭발음에 깨서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뉴스를 걱정스럽게 지켜보았을 뿐이다.
긴급한 용무가 없으면 철수하라는 한국외교부의 문자메시지가 종일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10월에 결혼하는 딸의 걱정스런 메시지가 내 마음을 흔든다. 나는 던져진 존재이고 자유를 갈망한다.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그래서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타는 것이 내겐 긴급한 용무라고 우기기로 했다. 내일 비행기 타고 카파도키아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