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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n 21. 2023

죽음을 디자인할 수 있다면...

객사를 그리다.


어떻게 죽기를 원하시나요?


당신은 어떻게 죽기를 기대하나요?

당신의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주변 지인들의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지내다가 숨이 곧 멎기 직전에 큰 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거기서 돌아가시지 않나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도저히 혼자서는 생활을 할 수 없는데 함께 생활하며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주 많다면 사람을 사서 집에서 지낼 수 있겠지요. 아니면 배우자나 자식의 인생을 희생하여 집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도 있고요. 이즈음 그렇게 희생할 자식을 보기는 어렵지요. 자식의 인생을 희생시키는 것이라 대부분의 부모도 원치 않고요. 결국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다 보니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https://brunch.co.kr/@jkyoon/434 )란 책이 있어요. 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아직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만들어질지 모르겠어요.


65세 어르신인 제게 장래 희망이란 것이 있을까 싶지만, 장래 희망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죽고 싶어요. 어느 누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마냥 죽음을 기다리고 싶겠어요!


인생을 설계한다고 하지요. 설계를 디자인이라고도 합니다. 장기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게 살아야 시행착오를 덜 겪으며 잘 살 수 있다고들 하지요. 과연 당신은 인생을 설계하면서 살아오셨나요? 인생을 설계하는 것의 마지막이 죽음을 디자인하는 것 아닐까요?


모든 설계는 목적이 뚜렷해야 하고 여러 가지 제한조건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식이 생기는 사춘기까지는 자기가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지요. 양육자인 부모가 디자인한다고 봐야지요. 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생기는 사춘기부터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중요하고요. 질풍노도의 시간이라고 하지요. 그렇지만 제한조건이 너무 많아 설계되지 못하고 살아내기 급급한 인생도 많이 있습니다.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도 노후를 설계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얘기지요.

당신의 노후는 어떻게 설계하시렵니까? 설계를 하고 계시기는 한가요?


설계는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냥 잘 살고 싶다는 것은 뚜렷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잘 죽고 싶다는 것 역시 뚜렷하지 않아요. 노후설계의 목적은 어떻게 죽을 것이냐를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한 대로 되지도 않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모르기에 노후설계가 아주 어려운 문제지요. 집에서 혼자 편안하게 죽고 싶지만, 이는 희망사항이지 구체적이고 뚜렷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의 형태가 확실해야 합니다. 고독사나 객사처럼 말입니다.


점점 의식은 희미해져 갑니다. 기억력은 깜빡깜빡하다가 아예 없어지고, 판단력은 왔다 갔다 하다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결국은 의식다운 의식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육체가 천천히 소멸되듯이... 그런 말 있어요. 비틀비틀하다가 비실비실하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서 죽기를 기다린다고요. 어르신은 언제 비틀거릴지 모릅니다. 이미 비틀거리고 있다면 언제 비실거릴지 모릅니다. 의식이 희미해지기 전에 죽음을 확실히 설계하고 싶습니다. 아주 또렷하고 구체적으로...


저의 구체적 목표를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입소를 피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희망사항이 아니라 목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육체보다 의식이 먼저 떠나면 오히려 다행이지요. 치매가 와서 자신을 잃어버리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가족들이 힘들어하겠지만, 본인은 의식이 없으니 슬프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 고모님은 그렇게 요양원에서 12년을 머물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있으나 육체가 먼저 망가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요양원에서 기약 없는 연옥을 견뎌야 합니다. 결국은 육체가 버티지 못하는 순간 생을 마감하겠지요.


죽음만이 유일한 퇴원인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많은 분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나는 남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망상(?)이나 환상(?) 아닐까요? 아예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생각 자체를 회피함으로써 죽음을 잊고 살지요.


저는 객사를 그려봅니다.


객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일 생각입니다. 쉬지 않고 혼자 길을 떠날 생각입니다. 계속 걸을 생각입니다. 비틀거릴지언정 지팡이 짚고라도 계속 걸어볼 생각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계속 걷다 보면 객사가 완성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길에서 혼자 죽고 싶습니다...


어떤 배우(김혜자)의 글에서 보았습니다. 이번 배역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번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여행에서 나는 객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도 객사를 그리며 마지막 여행의 계획을 짜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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