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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l 01. 2023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자동차 모델이나 트림 중에 GT란 것이 있는데 이는 'Grand Touring'를 의미한다. 줄여서 GT라고 엉덩이에 큼지막하게 레터링을 붙여놓기도 한다. GT 모델은 고속도로를 포함한 장거리 여행하기에 적합한 고성능 자동차다. 장시간 운전을 위한 편안한 승차감과 많은 짐가방을 위한 충분한 트렁크 용량은 필수다.


‘Grand Tour'는 1660년경부터 1840년대까지 유럽, 특히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한 장기 유럽여행을 말한다. 보통 두 명의 가정교사와 여러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하는 이 여행은 2년 이상 걸렸다. 유럽의 변방인 영국보다 선진 문화를 갖고 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주로 여행했다. 젊은 귀족의 자제들이 세계의 정치와 사회,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랜드 투어를 해야 한다고 그 당시 생각했다. 지금 대학생들의 어학연수나 유럽배낭여행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남녀 모두에게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유대인 말고 아랍인도 이스라엘에 있는데 이들은 징집대상이 아니란다.) 만 18세가 되면 2023년 현재 남자는 2년 반, 여자는 2년을 복무한다.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다. 그리고 병역의무를 완수한 젊은이들은 1년 내지 2년 동안 세계여행을 떠난다.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 등지를 여행하다 보면 이렇게 풋풋한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세계여행을 하면서 나름 인생을 설계하고 전공을 정한다.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대학을 간다. 우리와 달리...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은 22세의 나이에 영국의 탐험선 비글호에 승선한다. 그리고 무려 5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애초에 3년 정도를 예상하고 떠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귀국한 이후에는 영국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사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집을 떠나 5년을 길 위에서 잤으니 그럴 만도 하단 생각이 든다. 전 세계를 돌며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분석하고 책을 쓰며, 직업다운 직업을 갖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대단한 금수저임에 틀림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내가 혼자 여행 하는 이유'란 책을 쓴 작가 카트린 지타는 자기 성찰을 위해 틈만 나면 혼자 여행을 떠난다.(  https://brunch.co.kr/@jkyoon/64 ) 자기 성찰을 그렇게 자주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상에 지친 대부분의 호모 사피엔스는 일상을 벗어나고파 항상 여행을 꿈꾼다. 마침내 꿈꿔온 여행을 떠나며 여행은 종합행복세트라는 것을 실감한다.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과 여행을 떠나, 보고 먹고 웃고 떠들다 보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는 마음이 든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내게 우울한 사춘기를 선물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난생처음 바다를 보았다. 처음 본 바다는 평생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집이 싫었다. 진정 가출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배짱은 없어 독립을 꿈꾸며 오히려 실력(?)을 닦았다. 국내여행정도는 용돈으로도 충당되던 대학생 시절에는 방학만 되면 친구들과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노하우가 좀 쌓이자 설악산 가을 단풍을 보겠다며 학기 중에도 혼자 텐트 메고 마등령을 넘고 대청봉을 올랐다. 그 당시의 내 마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혼자 살고 싶었다. 혼자 있으면 너무 좋았다. 새어머니와의 갈등도 없고, 아버지와의 충돌도 없고, 어쭙잖은 중재자들도 없었다. 여행하는 동안 나만의 자유가 며칠 동안 존재했다. 그렇게 나는 등산을 여행으로 받아들였고 틈만 보이면 산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학위를 받고 직장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기고, 내 차가 생기고 자유를 얻었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드디어 독립한 것이다. 차에 온 가족을 태우고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인도에서, 러시아에서, 유럽에서... 인생은 그 자체가 여행이라고 부르짖으며, 여행이 생존의 목적인양 지구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여행은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다. 우울했던 사춘기를 보상받고자 그렇게 열심히 여행한 것으로 지금은 이해된다.


곧 있을 사회적 죽음(정년퇴직)을 준비하며 하고 싶은 것 역시 여행이다. 그렇게 여행을 했는데도 찰스 다윈처럼 힘들고 긴 여행을 안 해봐서 그렇다. 이즈음 여행 트렌드가 힘든 패키지여행에서 제주 한 달 살기와 같은 정주형 여행으로 변해가고 있다. 여행에 갈증을 느끼던 많은 사람들의 욕구가 패키지여행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니 이제는 유유자적하며 즐기는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외국의 한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전전하며 세계여행을 다니는 부부가 있다. 그들의 책이 있다. 캠핑카를 타고 남미의 파타고니아를 누비는 부부도 있다. 그들은 유튜버다.


호핑 투어란 것이 있다. 호핑(hopping)은 메뚜기가 폴짝하고 뛰는 것을 의미하는데, 섬이 많은 바다에서 섬과 섬을 배로 호핑 하며 구경하는 것이다. 대형 크루즈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도 일종의 호핑투어다. 대학생들의 유럽기차배낭여행도 도시 간을 기차로 이동하는 일종의 호핑투어라고 생각한다. 대륙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민족마다 다양함이 있다. 그 다양함으로 인하여 여행하는 기간 내내 지루하지 않다.


대륙을 국가를 지역을 민족을 호핑 하다 보면 그것이 결국 완성되지 않을까? 한 국가에서 관광비자로 머물 수 있는 만큼 머물다 옆 나라로 옮겨 다시 비자가 허용하는 만큼 머물며 국가를 호핑 하다 보면 죽음을 맞지 않을까? 꿈꾸고 원하고 설계한 '객사'의 완성을 위해 나는 여행을 떠난다.

필리핀 클락필드 공항 근처 상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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