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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Aug 24. 2023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련다.

필리핀 가는 길이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환승하여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 갈 생각이었다.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사당역이 종착인 전동차를 탔다. 제일 앞칸에 탔다. 좀 걷더라도 제일 앞칸을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짐은 기내용 캐리어 하나와 작은 배낭을 하나 메고 있었다. 캐리어는 잃어버린다 하여도 아무 문제없다. 세면도구와 옷가지뿐이라. 배낭에는 중요한 것이 모두 들어있다. 양압기, 맥북, 혈압약뿐 아니라 해외여행 시 가장 중요한 여권이 있다. 달러는 공항에서 수령할 예정이라 돈은 없지만 신용카드가 여러 장 들어 있다. 전동차에 올라탔는데 노약자석의 한쪽이 큰 짐 두라고 좌석이 없었다. 쓰러지지 않게 캐리어를 눕혀 놓았다. 전동차 중간에 캐리어가 잘 안 보이는 쪽의 빈자리가 있다. 메고 있던 배낭을 머리 위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이폰을 뒤적이며 시간을 흘렸다. 캐리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들은 살아만 있어도 다행이고, 딸은 눈에 보여야 한다던 골프장 캐디의 명언이 생각났다. 캐리어가 딸인가 보다.( https://brunch.co.kr/@jkyoon/523 )


회현역을 지나며 다음이 서울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황급히 캐리어 들고 내렸다. 공항철도 사인이 어느 쪽인가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배낭이 있어야 할 등이 허전함을 느꼈다. 머리 위 선반의 배낭을 두고 내렸음을 깨달았다. 순간 뒤돌아보니 문 닫은 열차가 떠나간다. 아뿔싸 내 배낭!!!!


오늘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찌해야 하나 멘붕에 빠져있는데, 곧이어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하여 문이 열린다. 일단 타고 보자. 숨을 크게 몇 번 들이쉬고  네이버 맵에서 사당역을 찾았다. 4호선 사당역으로 전화를 걸었다. 쓸데없이 긴 안내 멘트 이후에 역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서울역에서 내렸는데 사당역이 종착역인 전동차 제일 앞칸에 배낭을 두고 내렸다고… 역무원왈 사당역에서 청소를 하고 회차한단다. 그때 배낭이 나올 거라고… 그러면서 서울역에서 사당역까지 16분 걸린단다. 그렇게 긴 16분 동안 지난 65년의 인생이 소위 가로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마침내 내 인생 다 됐구나...


사당역에 도착하여 역무실(고객지원실)을 찾아 올라갔다. 분실물들을 찾으러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분실물 찾는 창구가 제일 앞이다. 사당역에 설치된 CCTV가 50개 이상인 것 같다. 큰 모니터를 보고 있던 젊은 직원이 나를 보더니 다시 모니터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다고 얘기해 준다. 그러더니 화면 하나를 크게 키운다. 거기에 내 까만 배낭이 보인다. 우와!!!  뒤에 앉아 있던 선임 직원(역장일지 모른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젊은 직원에게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한다. 선임 직원을 따라 다시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플랫폼 끝에 카트가 놓여 있고 거기에 내 배낭이 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우리나라가 제법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16분 동안 아무도 배낭에 손대지 않았고, 청소하는 사람들도 물건에 관심이 없다. 이렇게 분실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분명 선진국임에 틀림없다. 만약 내가 탔던 전동차의 종착역이 오이도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한 시간은 더 오이도까지 갔어야 하나? 오이도역에서도 이렇게 찾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도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까? 'God always bless me!'  항상 여유 있게 다니는 습관이 중요하다. 특히 어르신은...


서울역으로 다시 돌아오는 16분 동안 공항철도 직통열차를 스마트폰으로 예약했다. 워낙 일찍 집에서 출발하여 아직도 시간이 충분하다. 서울역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 피울 시간도 될 것 같다. 놀란 가슴이 담배를 찾는다. 서울역에 도심공항터미널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도심공항터미널을 이용하려면 직통열차를 먼저 예매해야 한다. 그리고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고 출국심사를 받고 직통열차를 타고 공항을 가서 승무원들이 이용하는 통로를 따라 출국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내용 캐리어라 굳이 수화물로 부치지 않아도 되지만 도심공항터미널을 이용해 보는 것도 경험일 것 같았다. 직통열차를 앱으로 예매하면 QR코드가 생성되는데 이 코드가 승차권이다. 도심공항터미널은 이 코드가 있어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충분한 시간여유(비행기 출발 세 시간 전)가 필요하고 특히 골프채 같은 큰 짐을 인천공항까지 갖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는 장기와 단기가 있는데 늙으면 단기 기억부터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물건을 자꾸 흘린다. 그리고 어디에 뒀는지 몰라 물건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인생을 쓴다. 이런 실수가 잦은 내 친구는 최근에 결국 MRI까지 찍었다. 그런데 아직은 괜찮다고 의사가 1년 뒤에나 보자 했다고 했다. 문제는 분명히 있는데 어찌할 도리 없으니 그냥 살라는 얘기 같다. 나도 친구 따라 단기 기억에 문제가 생기는 듯하다. 일련번호(도어록 비밀번호) 같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소중한 물건을 어디에 잘 모셔두었는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


기억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르신은 판단력에도 문제가 생긴다. 판단이나 결정은 관련된 모든 정보와 지식을 고려하여 내리는 것인데, 이렇게 단기 기억에 문제가 있다면 모든 정보를 다 고려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억력의 문제는 판단력의 문제로 통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결정권을 넘겨주어야 한다. 원로 대접받으려 하지 말고 연로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지 않으면 성질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안 보이는 딸(캐리어) 챙기느라 머리 위 배낭을 놓쳤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련다. 연로했음을... 그렇게 똘똘하던 재거니도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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