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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Aug 25. 2023

20.7년 된 자동차를 떠나보내며…


중독이 나쁜 것은 다른 좋은 경험을 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너무 아끼고 오래 사용하는 것도 중독이란 생각이 든다.


물건이 값비싼 것이라면 아끼는 것은 당연한데... 물건을 소유하고 있기 위해 계속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보통 물건들은 살 때만 돈이 들지만, 자동차 같은 경우는 좀 다르다. 처음에 할부가 아닌 전액 현금으로 샀다 하여도 자동차세와 자동차 보험료가 만만치 않고, 세워만 놓아도 성능유지를 위한 비용이 든다. 그리고 성능유지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조금이라도 달려줘야 한다.


당신이 사용하는 치약은 어떤 상태인가요? 치약의 가운데를 눌러 짜시나요? 밑동부터 깨끗하게 짜올려서 사용하나요? 같은 욕실에서 공동의 치약을 사용하는 부부가 치약 짜는 방법이 달라 잔소리로 시작하여 부부싸움을 거쳐 이혼까지 갈 수도 있다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마지막 한 톨의 치약을 짜내기 위해 애쓰시나요? 아니면 적당히 사용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에 익숙하신가요?


저는 밑동부터 끝까지 짜내기 위해 용을 쓰는 스타일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일종의 저장강박증입니다. 뉴스에 나는 저장강박증 환자들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추억이나 기억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추억강박증'환자라고 부릅니다. 완전히 망가져야 버립니다.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해야 버립니다.(전공이 기계공학이라 그런지도 모릅니다. 기계는 꽤 오래 수리가능합니다) 아무리 짜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아야 치약을 버립니다. 치약조차 이렇게 다루는 제가 마음먹고 사서 애지중지한 자동차를 어떻게 처분하겠습니까?


저와 함께 이 자동차가 생을 마감하는 꿈을 꾼 적 있습니다. 파타고니아( https://brunch.co.kr/@jkyoon/335 )란 제 습작 소설에서…


2002년 12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소도시 알투나에서 20,300불 주고 구입한 Dodge Intrepid 2003 SE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나요? 20년 8개월이 지났지만 경고등 하나 들어오지 않고 자잘한 범퍼손상사고는 몇 번 있었지만 복원하여 자동차 외관도 완벽합니다. (그러나 철판이 속에서 녹슬기 시작했습니다. 도장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점들이 점점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덧칠을 하여도 금세 다시 번질 것을 알기에 어찌할 바 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명품이란 것이 존재하는 이유지요.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은 자신이 명품임을, 자신의 인생이 명품임을 주위에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10년이 지나면 초기 구입비용의 10% 내지 20%의 잔존가치가 있습니다. 소위 명품 자동차들이 20% 넘는 잔존가치를 갖고, 대부분의 보통(?) 자동차들은 10%의 잔존가치가 남습니다. 그런데 20년이라면 고철값에 해당하는 가치만 남습니다. 고철값에 연동되는 폐차 시 받는 돈이 지금은 80만 원 정도입니다.


저 같은 추억강박증 환자는 아끼던 자동차를 처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심리적인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입니다. 자동차의 콘솔박스를 비롯한 저장공간을 다 비우고, 갖고 있던 소모품(오일필터와 에어클리너 필터 및 전구류)을 트렁크에 넣으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심지어 100불 넘게 주고 샀던 영어로 된 정비매뉴얼도 있습니다. 20년 동안의 정비내역이 기록된 로그북을 넘기며 많은 기억이 사진처럼 떠오릅니다. 20년이란 시간은 매우 긴 시간입니다. 대부분의 말기 암환자들이 살고 싶다는 10년의 무려 두 배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정말 애지중지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한국에는 한 대 밖에 없는 자동차(정식 수입된 적이 없으니... 그러나 미국에는 아주 흔했던...), 독특한 사이드라인을 갖고 있는 자동차(Cab-forward design의 초기 형태), 쐐기형의 스포티한 형상의 전륜구동 자동차(스포츠카는 기본이 후륜구동), 초기 성능을 비롯한 모든 기계적 특성을 완벽하게 유지한 자동차, 저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자동차를 모는 아주 특별한 삶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습니다. 20년 전 엔진과 4단 변속기(지금은 보통 8단)가 조합되어 연비가 형편없습니다. 뒷좌석의 목받침도 없어 장거리 이동시 불편합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동네만 굴러 다니는 차가 됐습니다. 일 년에 2000킬로도 못 뛰는... 후방 근접 경고센서도 없고 후방 카메라도 없습니다. 주차면적이 협소한 경우에는 매번 내려서 확인해야 합니다. 소위 미국형 Full size car라 길이가 길고 폭도 넓습니다. 사이드미러가 접히지 않아 협소한 주차장에서는 옆에 주차된 차주에 미안합니다.


초기에는 미국출장 갈 때마다 월마트에서 오일필터 같은 소모품도 사 오고, 심지어 변속기 제어 컴퓨터(Transmission Control Unit)를 미국 딜러샵에서 사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마존에서 아주 쉽고 싸게 애프터 마켓용 부품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정도면 주문한 부품이 도착합니다. 물론 불안하기는 합니다. 부품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마존에서 2만 원에 구할 부품을 한국에 있는 부품상은 20만 원에 팔기도 합니다. 그러나 20년이 넘다 보니(미국에 있던 인트레피드도 거의 다 폐차되다 보니), 아마존에도 이제는 부품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중고차 딜러들이 경매로 차를 사는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이러한 사이트도 여러 개 있습니다. 결국 폐차 때 받을 수 있는 비용보다 50만 원 더 받고 중고차 딜러에게 넘겼습니다. 아직도 너무 잘 굴러가는(언제 설지 모르지만) 자동차를 폐차시키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살아 있는 자동차를 죽일 수는 없더라고요. 정신(?) 나간 좋은 주인 만나 몇 년 더 생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른 좋은 경험을 하기 위해 처분했습니다.


9년 된 아우디 A7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아우디는 처음입니다. 2014년 3.0 TDI입니다. 폭스바겐의 V6 3.0 디젤엔진은 그 당시 포르셰 파나메라와 카이엔, 아우디 Q7, 폭스바겐의 투아렉과 페이튼에 들어가는 엔진입니다. 타이밍체인의 텐셔너와 냉각수 분배기 등에 고질병을 갖고 있지만 완벽한 엔진이란 없습니다. 큰돈이 들지만 수리가 가능합니다. 9년 동안 옆에서 봐왔던 자동차라 이력을 압니다. 이런 중고차를 입양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A7의 사이드라인이 정말 우아합니다. 스포츠백이라는 지금 한창 유행하는 디자인을 거의 처음 적용한 모델입니다. 주행거리도 11만 정도라 적당하고 고질병도 하나는 수리된 상태입니다. 아우디를 소유했기에 정성껏 고치면서 운전하는 즐거운 경험을 할 것 같습니다.


자동차를 소유했던 목록에 '중고 아우디 A7 3.0 TDI'를 추가합니다.

( https://brunch.co.kr/@jkyoon/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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