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2년 2개월의 외손녀 도은이는 재롱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음악소리가 들리면 엉덩이를 흔들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춥니다. 아는 노래라면 가사를 외워 따라 부릅니다. 표정도 어쩌면 그렇게 애교가 철철 넘쳐흐르는지 모릅니다. 손녀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만 3년 부모에게 보여주는 재롱으로 평생 할 효도를 다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소위 나쁜 짓을 하려 할 때 하지 말라고 말리면, 눈치를 보면서도 아주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날 사랑할 수밖에 없을걸?'
만 5년 6개월의 외손자 도민이는 이제 제법 컸습니다. 주고받는 대화가 되니까요. 작은 심부름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아가 성장하여 자기주장도 확실합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머뭇거리지 않고 결정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다 자기주장을 피울 때 거의 똥땡깡에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똥땡깡을 받고 있노라면 할아버지인 저도 짜증이 납니다. 붙잡아 엎어놓고 세차게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렇지만 때리지는 못하고 그 억지를 그냥 받고만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건부 사랑'이란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아주 옛날에 읽은 이야기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이시형박사의 책에서 읽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이고,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란 것입니다. 조건부 사랑이란 자식의 행동이 아버지의 기준을 만족시켰을 때 주는 사랑이란 것입니다. 망나니 같은 아들을 어머니는 사랑해도 아버지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른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자식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렇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장인 아버지의 기준은 제법 높고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많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기준을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자식들이 많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을 하늘 같이 섬기는 아내'란 말 들어보셨지요? 춘향이가 이몽룡을 하늘 같이 섬기지 않았나요? 이몽룡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었지만, 만약에 계속 과거시험에 떨어져 형편없는 비렁뱅이 양반으로 끝났다면, 그래도 춘향이가 하늘 같이 섬겼을까요? 현시대에 남편을 하늘 같이 섬기는 아내가 만약(?) 있다면, 아무리 남편이 경제력 없고, 술 마시고 행패를 부려도 결코 이혼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무원 남편과 돈 잘 버는 아내가 있습니다. 공무원 남편은 딱히 나무랄 데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가정에도 충실합니다. 그렇지만 가끔 보면 답답할 데가 있습니다. 공무원인 남편의 미래도 답답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아내보다 못할 데가 많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받을 것이라고는 '명예' 밖에 없네." 결국 공무원 남편은 쓸데없는(?) '명예'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중학생 소녀가 있었습니다. 친오빠 친구 중에 잘생긴 오빠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대학생이 된 잘생긴 오빠한테 과외를 받았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잘생긴 오빠와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오빠는 대학생 때부터 외교관이 되려고 했습니다. 소녀는 외교관의 아내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빠는 시험에 계속 떨어져서 결국 외교관이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처녀가 된 소녀는 말없이 오빠 곁을 떠나갔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유의 상당 부분은 결혼에 이르게 한 사랑이 '조건부 사랑'이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조건이 결코 채워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이혼을 떠올리고 결국은 결정하게 하는 것 아닐까요?
엄마의 무조건 사랑이 그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