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 연안의 트라브존
안탈리아를 떠나 트라브존으로 왔다. 무섭게 더운 지중해변을 떠나 쾌적한 흑해 해변으로 온 것이다. 진작 올걸... 트라브존은 호텔이 많지 않고 비싼 편이다. 하루에 50 불하는 호텔을 어렵게 찾아 3박이나 예약하고 왔다. 방은 내 교수 연구실의 반 정도밖에 안되지만 깨끗하다. 호텔 위치와 옥상 테라스가 너무 맘에 든다. 흑해 바다가 건물 너머 보이고 트라브존 공항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계속 눈 앞의 경치를 가로지른다.
비행기는 대단한 발명품이다. 그리고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저 육중한 덩치가 굉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뜨고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이렇게 발전한 비행기 덕분에 내가 이곳 흑해 연안까지 와 있는 것이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꿈꿔왔던 분야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넓고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는 기계공학을 어릴 때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자아로부터 우러나온 명령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남들이 유망하다 하여 선택하거나 특히 어른들의 권유로 보통 선택한다. 그러나 항공공학은 다르다. 항공공학은 기계공학의 일부가 날 것에 특화하여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80% 이상을 기계공학과 공유한다. 항공공학을 전공한 친구나 후배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비행기가 좋아서 자신이 선택한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러나 항공분야의 직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대학 졸업 후 일반기계를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가르치는 학부생 중에는 매년 항공정비사가 되고 싶다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공학을 점수에 맞춰 입학했는데 어릴 때부터 막연히 좋아 보이던 비행기가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게 하는 것이다.
대서양에 갇힌
지중해에 갇힌
흑해가 보인다.
이 곳 트라브존은 아주 오래된 도시다. 실크로드 상에 있는 도시이고, 예부터 바다와 육로로 교역이 활발했던 도시이다. 이 곳에 오는 가장 큰 이유는 수멜라 수도원을 보기 위해서이다. 높은 절벽 중간에 굴을 파고 수도원을 만들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전역뿐 아니라 엄청난 영토를 확보한 전성기에도 이 수도원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했다고 한다. 오히려 독립적인 운영을 하도록 자치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가 망하고 터키가 혼란에 빠졌을 때 이 수도원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지금 수도원은 복원 중이다.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로 앞 까지도 못 간다. 돌무쉬를 타고 마츠카에 내려서 택시를 대절하여 수도원을 멀리서 보고 왔다. 여러 사람에게 언제까지 수도원을 복원할 계획이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터키에 산재한 옛 로마의 유적지를 포함하여 박물관, 사원, 성당, 수도원도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 내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저앉은 건축물, 훼손된 벽화, 떨어져 나간 조각상 등을 보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건축가, 예술가, 인부와 노예들의 허망한 인생들이 보인다. 박물관 유리 속에 전시된 불쌍한 인생들의 부장품처럼 보일 뿐이다.
수멜라 수도원을 들어가지 못한 것이 전혀 아쉽지 않다. 자연이 만든 엄청난 절벽에 인간의 자취가 합쳐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일 뿐이다. 사소하고 의미 없는 것에 정신 집중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