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장 규정이 엄격하지 않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원래부터 그러진 않았지 싶은데 팬데믹을 거치며 대부분의 직원이 재택근무를 하게 됐고, 그와 더불어 많은 것이 변하거나 느슨해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복장의 자율화다.
특히 재무팀 소속인 나는 따로 외부 고객을 상대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그에서 더 자유로웠다. 그래도 한 번씩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은 비즈니스 캐주얼이나 원피스 등을 입는 편이었는데, 다른 이유보다 그렇게라도 안 입으면 도통 입을 일이 없는 옷들이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캐나다 사람들은 원래 옷을 편하게 입고 다니는 편이다. 넥타이를 매는 사람을 은행 직원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포멀한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을 보는 경우는 많지가 않다.
그러다 작년, 사무실 출근이 잡힌 어느 날, 마침 퇴근 후 바로 약속이 있어 좀 편하게 옷을 입고 싶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찢어진 청바지'.
참고로 나는 거의 평생을 '유교걸'로 살아온 사람이라 찢어진 청바지는 20대에도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한 번쯤은 입어보고 싶어 작년에 난생처음으로 마련한 청바지였다.
왜 그날따라 유독 그게 입고 싶었을까?
미팅이 몇 개 잡혀 있긴 했지만, 팬데믹 이후로 모든 미팅은 화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후 미팅 시간이 다가오는데, 마침 사무실에 출근해 있던 매니저가 이렇게 직접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자기 오피스에서 대면 미팅을 하자고 제안했다.
순간 무릎이 뻥 뚫린 청바지가 떠올랐지만 굳이 화상통화를 하자고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미팅 시간, 내 청바지에 시선이 집중되지 않길 바라며 노트북을 들고 쭈뼛쭈뼛 미팅룸으로 들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청바지를 본 매니저가 빵끗 웃으며 "찢어진 청바지네?" 했다.
내가 민망해하며 "이거 좀 너무한 것 같아?" 물었더니, 그녀는 바로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다.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 미팅 내내 어찌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그러다 몇 달 후,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팀 사람들이 다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매니저가 저 복도 끝에서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는 무려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어찌나 쫀쫀한 지 주름 하나 안 잡히게 아주 쫙 달라붙은 갈색 레깅스에 발목부츠를 신고 출근한 그녀를 보고, '아, 그때 찢어진 청바지 괜찮다고 했던 게 진짜였구나' 그제야 그녀의 진심을 알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2년 전, 그녀는 본인이 굉장히 이지고잉 (easygoing)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편하게 생각하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간 같이 일해본 결과, 그녀는 정말로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이었으며, 주어진 일을 기한 내에 완성하기만 한다면, 그 외 대부분의 일상에는 전혀 터치가 없는 그야말로 아주 이상적인 매니저의 모습이었다.
내 가치를 알아주고, 내 성과를 인정해 주고, 내 수고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는 그런 상사와 일하게 된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연차가 쌓일수록 '사람'의 중요성을 더 느끼게 된다.
연봉? 물론 중요하다. 복지나 워라밸은 괜찮은 회산지, 비전이 있는 곳인지, 내 적성에 맞는 업무인지도 다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떠나 직장인 스트레스 요인 1위는 역시나 사람 때문이 아닐까.
한 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퇴사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상사나 동료와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알린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 혹은 '나중에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까' 진짜 이유는 숨기고 조용히 퇴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직원들이 자꾸 떠나는 이유가 궁금한가? 겨우 연봉 몇 백만 원 더 올려 받겠다고 이직하는 직원이 괘씸한가? 워라밸, 적성 운운하며 툭하면 퇴사하는 젊은 직원들을 보며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하지만 그 직원이 떠났던 진짜 이유는, 사실 당신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이 글은 <헤드라잇>에도 올랐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AwOtaNE-3uJNjM-d4iijaA==?uid=etvI-v-XBEOclck1_n8Aw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