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라마바사
결혼 초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A는 한국어 공부 좀 안 한대니? 네가 시간 날 때마다 붙잡고 좀 가르쳐~"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나는 (엄마한텐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선 남편과 나는 영어로 소통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한국어를 할 수 있다면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과 조금 더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했다면 나는 한국 사람이랑 결혼했어야 했다.
남편은 이미 모국어 포함 3개 국어를 하는데, 거기에 (단지 한국인이랑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어까지 추가하라는 건 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남편 역시 나에게 중국어 공부 혹은 중국문화에 대한 공부를 제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이게 서로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방법이자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한국어를 공부해 보고 싶다고 먼저 말을 꺼내왔다.
로컬 대학교에 한국어 수업 과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먼저 관심을 표했으니 나도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다.
엄마한테 한국어 교재를 몇 권 보내달라고 부탁해서 그걸로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에 갔을 땐 서점에 들러 낱말카드, 교재 등 필요한 것을 잔뜩 구입해 왔다. 자음과 모음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간단한 단어는 읽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우리 집엔 어느새 (마치 아이를 키우는 집처럼) 여기저기 낱말카드가 붙었다.
“이거 뭐야?”
“나비”
“이건?”
“고구마!”
“올~ 그럼 이것도 알려나?”
“... 따앙-콩”
쓰기 실력도 점점 늘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단어 정도만 쓰는 수준이더니, 어느새 짧은 문장 정도는 쓸 수 있는 실력이 됐다.
재미가 들려서 우리 가족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면서 받아쓰기도 시켜봤는데, 어찌나 창의적으로 받아 적는지 보는 내내 숨 넘어가게 웃었다.
그나마 울 언니 이름은 내 이름과 비슷하고 받침이 없어서 무난하게 썼는데, 받침이 있는 엄마 아빠 이름을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조합해서 쓰는지 그 뒤로도 꽤 한참을 두고두고 놀렸다.
한국어 수업 기초반에서 중급반으로 가니, 어느새 문장을 지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마땅히 쓸 게 없었는지, 당시 우리가 즐겨보던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노래 가사를 따라 적어왔다.
그 후로도 실력이 쭉쭉 늘더니 어느새 일기까지 쓸 정도로 발전했다. 짝짝짝-
(아래 일기 좀 보세요 ㅋㅋㅋ)
지금은 웬만한 대화는 한국어로 가능해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한국어 과정이 학생수 부족으로 기초/중급반 이상으로 열리질 않았고, 그러다 보니 더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코로나로 한국에 몇 년간 못 가게 되자 자연스레 한국어에 대한 공부 열정이 식었는지, 지금은 다시 처음 몇 개월 공부했을 때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가끔 엄마 아빠랑 비디오 톡을 하면 그간 배운 한국어 실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엄마, 모해요오?”
“응~ 엄마 그냥 집에 있어”
“엄마, 바빠요오?”
“아니, 안 바빠. 점심 먹고 이따 등산 갈 거야”
“오, 그렇구나. 잘했어요.”
뭔가 대화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런데 그의 한국어 실력은 딱 여기까지다. 대부분 “모해요?”로 시작해서 “잘했어요”로 끝나는 패턴 ㅋㅋㅋ
덕분에 우리 엄마 아빠는 늘 사위한테 “잘했다”는 칭찬을 듣는다.
한국어 수준이 조금 더 늘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크게 아쉽지 않다. 먼저 한국어 공부하겠다고 해줘서 고마웠고, 공부하는 동안 많이 웃었고, 덕분에 이런 일기까지 기념으로 남았으니 그걸로 됐다.
#그러나발음은엉망진창 #나만알아들을수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