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는 냈는데... 뭐부터 해야 하지?
호기롭게 사표를 낸 건 물론, 내 손에 쥐고 있던 사과가 그냥 맛없는 사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는 썩은 사과였다는 걸 안 후에 비교적 쉽게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어학연수라는 계획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썩은 사과라도 조금 더 붙들고 있으면서 끝까지 버텨보거나, 이직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나이 들기 전에 외국에서 살아보는, 그러면서 영어 실력도 늘리고 사람도 만나고 경험도 쌓는 일에 대한 꿈이 있었다. 이제는 썩어 냄새나는 사과까지 내려놨으니, 다음 목표는 명확해졌다.
퇴사 전부터 어학연수에 필요한 정보는 조금씩 모아두었었지만, 본격적인 준비는 퇴사 후에 시작했다.
1. 나라 및 도시 정하기
우선 나라 및 도시를 정해야 했다. 영어 공부가 제일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연수지 후보로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있었는데 의외로 나라 결정은 꽤 수월했다. 우선 그 나라의 악센트가 있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는 제외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 캐나다 영어도 캐나다 특유의 악센트가 있다고 함) 미국보다는 캐나다가 더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니 캐나다로 가자는 결정이 났다.
하지만 도시를 정하는 데 오히려 시간이 더 들었다. 우선 한국인이 많을 것 같은 대도시는 제외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영어 실력 향상이 제일 큰 목표였기 때문에 한국인이 많다는 건 그만큼 한국어로 소통할 여지가 늘어날 거라는 생각에, 한국인이 적은 곳이라는 조건이 아주 중요했다. 그리고 동부와 중부 지방은 겨울에 너무 춥다고 해서 제하고 나니 남은 선택권이 많지는 않았다.
그때 엄마가 어디서 들으셨는지 캐나다 서부에 '빅토리아 (Victoria)'라는 도시는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다. 엄마가 빅토리아를 추천한 이유는 일단 대도시가 아니라 한국인 수가 적을 것 같고, 노인 인구가 많은 도시라 학원 수업 외 시간에도 공원 등에 산책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연스럽게 얘기하다 보면 영어가 늘지 않겠냐는 거였다. 다소 황당한 이유였지만 빅토리아라는 도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알고 보니 빅토리아는 캐나다 내에서도 '은퇴 후 지내고 싶은 도시 1위'로 꼽힐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었고, 실제로 노인 인구의 비율이 높은 곳이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빅토리아는 BC (British Columbia) 주의 제일 큰 도시인 밴쿠버 옆에 있는 밴쿠버 섬 제일 밑자락에 있는 아주 작은 도시였는데, 지도에서 빅토리아를 찾은 순간, 나도 모르게 '여기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날씨 좋고, 한국인이 많이 없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많은 곳. 내가 원하는 조건에 딱 맞는 도시였다.
2. 어학원 및 홈스테이 등록
다음으로는 유학원 상담 및 각종 설명회 등을 다니며 모은 정보로 빅토리아에 있는 어학원을 등록했고, 가족같이 머물며 내 영어와 생활을 도와줄 홈스테이도 신청했다. (홈스테이: 현지 가정에 머물며 가족같이 지내는 방식으로, 식사는 물론 여가생활도 같이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고, 잘 이용하면 영어 실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
어학원: 나는 크고 프로그램이 많은 학원 대신, 규모가 조금 작더라도 더 가족같이 챙겨 준다는 학원으로 선택했다. 어차피 영어는 나 하기 나름이니, 조금 더 편안한 환경에서 가족 같은 케어를 받으면서 공부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홈스테이: 홈스테이는 필수는 아니다. 하지만 현지 문화 체험에 많은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초기 영어회화 실력 향상에 단연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학생들이 처음 몇 달은 홈스테이에서 살다가, 마음 맞는 친구가 생기면 금세 같이 방을 구해 독립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영어 실력 향상이 주목적이라면 나는 홈스테이에서 가능한 오래 지낼 것을 강추한다.
홈스테이 신청서 작성 시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다음과 같다.
- 어린아이가 없는 집 (육아에 바쁘면 홈스테이 학생을 케어할 시간이 부족할 거라고 생각)
- 반려견, 반려묘 등 동물을 키우지 않는 집 (나는 개와 고양이 털에 알레르기가 있다)
- 홈스테이 학생과 여가생활, 문화생활 등을 함께 할 의향이 있는 집
그 외 특별히 알레르기가 있거나 먹지 않는 음식 등이 있으면 추가로 작성하면 된다.
3. 예산 및 비용 책정
제일 큰 비용이 들 학원과 홈스테이를 등록하고 나니 대략 한 달 예산이 감이 왔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과 퇴직금까지 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자금은 약 2천만 원. 조금 빠듯하게 생활하면 학원비, 홈스테이비, 생활비 등 다 해서 한 달 2백만 원이면 될 것 같았다. (2009년 기준). 나는 처음부터 부모님께 손을 벌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 예산 안에서 딱 10개월 공부하고, 혹은 그 전에라도 돈이 떨어지면 바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예산과 지출 계획까지 정리하고, 비행기표도 끊어놓고 나니, 이제 대략적인 준비는 끝나 있었다.
4. 영어 공부
이제 출국 전까지 내가 할 일은 막판 스퍼트를 내서 영어 공부를 조금 더 해 놓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나름 공을 들였던 회화 공부를 조금 내려놓고, <그래머 인 유즈>라는 책으로 문법을 한번 더 탄탄하게 다지는 쪽으로 공부 방향을 잡았다. 한 권만 보는 대신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봤고, 예시문 중 유용할 것 같은 것을 골라 여러 번 읽어보거나 일부는 암기하는 식으로 공부했다.
캐나다에 가면 자연스럽게 회화를 할 기회는 늘지만, 오히려 문법 등 기초 다지기에는 따로 시간을 쓸 일이 많이 없을 것 같아 택한 방법이었는데, 나는 이게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문법이 조금 약해도 자꾸 부딪쳐서 사용하다 보면 회화 실력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늘지만,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회화 실력이 늘수록 언어의 완성도에서 차이가 난다.
5. 그 외 준비한 것
- 캐나다 유학에 관련된 카페에 가입해서 이런저런 사전 정보 얻기
- 홈스테이 가족과 이메일로 간단한 소개 및 사진으로 미리 교류하기
- 외국 친구들한테 줄 한국 기념품 준비하기
- 캐나다 여행책자 보며 연수 기간 동안 꼭 다녀오고 싶은 곳 생각해보기
출국 날짜가 점점 다가올수록 내가 꿈으로만 그리던 일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설렜다.
그리고 그 해 10월 8일, 나는 캐나다 빅토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잘 다녀올게. 10개월 후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