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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Feb 13. 2022

두 번째 홈스테이

(feat. 캐나다 엄마아빠)


홈스테이는 보통 하루 세 끼 (혹은 점심 제외 두 끼) 식사가 포함된 형태로, 현지 가족과 일상생활 및 여가 생활도 함께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서로 맞는 상대를 찾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내 두 번째 홈스테이는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지난 포스팅인 <캐나다 홈스테이에서 겪은 Emergency>에서 썼듯 나는 첫 번째 홈스테이 집을 급하게 나와야 했고, 일단 그날 당장 나를 받아줄 방이 있는 집을 찾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다른 여러 고려사항을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두 번째 홈스테이 가족을 만났다.


(나중에 아저씨한테 들은 얘기로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여전히 울음을 못 그친 상태였는데, 그런 나를 보고 너무나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전 집에서의 얘기를 대강 전해 들은 터라 안아줄 수도 없었다고 하셨다.)


학원 매니저가 자기 번호를 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돌아갔고, 곧 이어 아주머니가 내 방을 소개해 주셨다.


작은 싱글 침대와 붙박이장 공간을 개조해 만든 책상과 서랍 등이 있는 방은 저번 집보다 훨씬 작았지만, 아늑한 느낌이었다.



일단 짐을 대충 풀고 저녁을 먹은 후 홈스테이 한 달 비용 750불이 든 봉투를 아저씨께 드렸다. 그런데 아저씨가 이 돈은 당분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너는 우리 집을 '선택'해서 온 게 아니잖니. 너한테 일주일 정도 시간을 줄게. 우리랑 지내면서 너랑 안 맞는 부분은 없는지, 버스 타고 학원 다니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보고, 혹시 우리 집보다 더 너와 맞는 조건의 집을 찾게 된다면 언제든 나가도 좋다. 그렇게 되면 이 돈은 그대로 돌려줄게”


라며 거실 옆 정수기 위에 봉투를 그대로 올려두셨다.



감동...


그리고 나는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 집에 남겠노라 확답을 드렸다.




우리 엄마 아빠랑 연배가 비슷하신 아줌마 아저씨는, 자녀가 없는 딩크 부부셨는데, 홈스테이를 11년째 하고 계신다고 했다. 홈스테이를 하면서 여러 국적의 많은 학생을 만나 온, 홈스테이 경험이 많으신 분들이셨다. 간호사 출신인 아주머니는 따뜻했고, 공무원이신 아저씨는 유쾌하신 분이었다.


저녁은 항상 같이 먹었고, 저녁식사 후에는 (영어를 못 해도 이해하기 쉬운) "American Idol"이나 "America’s Got Talent" 같은 쇼를 같이 봤다.


아저씨가 하키 광팬이라 매년 시즌권을 끊어서 매 경기를 보러 가시는 덕에 나도 여러 번 따라갔고, 하키 경기가 있는 날은 늘 외식을 했다.


아저씨의 장난감이었던 스포츠카를 태워주시는 날이면 뚜껑을 열고 “Woo hoo!!” 소리를 질러 매번 아저씨를 웃겨 드렸다. (오픈카를 처음 타 본 나는 진짜 신나서 소리 지른 건데, 아저씨는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웃기다며 매번 놀리셨다.)


아주머니 친구 모임, 산책 모임에도 따라갔고, 가끔은 같이 운동도 했다. 저녁 먹고 커피 한잔 하자며 스타벅스에 가기도 했고, 주말에는 아이스크림 맛집에 가서 줄 서서 사 먹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나, 내가 다운타운에서 늦게까지 약속이 있는 날은 전혀 싫은 내색 없이 픽업을 와 주셨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내 영어실력은 감사하게도 조금씩 늘고 있었고, 나는 아주머니한테는 포근하고 따뜻한 사랑을, 아저씨한테는 유머러스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을 배웠다.


이분들을 만난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저녁은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번갈아가면서 맛있고 푸짐하게 준비해 주셨는데, 나는 요리 똥손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꼭 내가 대접하고 싶었다.


캐나다에서 알바를 구하고 첫 월급을 탄 날, 나는 그 기념으로 저녁을 직접 차려드리기로 했다.


내 인생 첫 요리 - 불고기와 무쌈말이


레시피를 옆에다 펴 놓고, 몇 시간 동안 쩔쩔매면서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그럴싸한 (최소한 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나왔다. 입에 맞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너무너무 좋아하셨고, 그때 그 일이 좋은 추억으로 남으셨는지, 아저씨는 그 뒤로도 종종 내가 해 드린 요리 이야기를 꺼내셨다.


1년 정도를 지내다 나는 독립했지만, 두 분은 내게 그 후로도 캐나다 엄마 아빠로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셨고, 내가 학교를 가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을 하는 모든 순간, 누구보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주셨다.


그리고 그 뒤로 1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캐나다 엄마 아빠와 좋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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