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DNA

나라는 인간의 풍경

by 정리

“아싸 레벨 업!”

초등학교 6학년 이은정은 학교 끝나고 곧장 집으로 달려가 책가방만 던져 놓고 컴퓨터 책상 앞에 앉는다. 엄지발가락으로 재빨리 컴퓨터 전원을 켜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메이플스토리를 한다. 메이플스토리는 몬스터를 때려잡아 아이템과 경험치를 얻는 캐릭터 어드벤쳐 육성 게임이다.


내 캐릭터는 항상 마법사였다. 사촌오빠의 마법사 캐릭터가 쏘아 올린 찬란한 마법진에 반했기 때문이다. 몬스터 몇천 마리를 때려잡아야 저런 찬란한 마법진을 그릴 수 있을까? 처음 내 캐릭터는 나무 지팡이를 무식하게 휘둘러 몬스터를 때려잡는 정도였는데, 레벨업을 하면서 새로운 마법 스킬창이 열렸다. 파란색 불덩이를 쏠 수 있게 된 거다. 이제 내 무기는 나무 지팡이가 아니라 마법 지팡이가 되었다.


새로운 사냥터를 발견했다. 내 캐릭터 보다 몸집이 다섯 배나 큰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지하던전이었다. 덩치에 놀랄 새도 없이 옷깃만 스쳤는데 머리 위로 비석이 쿵- 하고 떨어졌다. 죽었다. 부활하자마자 그 몬스터를 다시 찾아갔다. 지팡이로 힘껏 때려보았지만 ‘MISS’만 연달아 뜰 뿐 작은 데미지도 입힐 수 없었다.


세 번쯤 더 죽었을까? 방법을 바꿨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그놈을 처치하기위해 내 레벨과 비슷한 뿔버섯을 때려잡으며 무기를 벼르고 경험치를 올렸다. 그러는 사이 체력도 늘고 그릴 수 있는 마법진도 늘어갔다. 때로는 생각지 못한 희귀 아이템을 주워 큰 값을 받고 팔기도 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공격을 당했을 때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이었다. 그렇게 단순 노가다로 새로운 사냥터마다 도장깨기를 하고 다녔다. 50대를 때려야 쓰러졌던 몬스터가 한 방에 끽하고 죽은 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일단 하다 보면 이전과 다른 어떤 모습이 된다는 것.



노가다 DNA는 나를 어떤 일이든 첫 삽 뜨기를 어려워하지 않은 사람으로 키웠다. 어릴 때는 레벨업이 보상이었다면, 대학에 입학하고는 ‘~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보상이었다. 클래식 좀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음대생만 듣는 ‘바로크 음악의 이해’ 전공수업을 신청했다. 서술형 시험지에 논술과 약술을 해왔던 사회과학대학 시험과 달리, 음대 시험은 ‘듣기평가’였다. 시험기간이면 텍스트를 읽는게 아니라 귀에 이어폰을 꼽고 시험범위의 음악들을 반복해서 들었다. 첫 마디만 들어도 작곡가의 이름과 제목이 생각날 정도로. 덕분에 고전 영화를 볼 때면 배경음악으로 시대를 가늠하는 스킬이 생겼다.


그렇게 커피 주문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행지에서 수영장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수영을 배웠다. 물건을 잘 고르는 소비자가 되고 싶어서 광고를 전공했고, 사물과 사람의 의미 있는 구석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해보기 전까지는 어떤 스킬창이 열릴지 모른다. 스킬창은 또 다른 스킬창을 여는 문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기 전과 하고 난 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른 땅에 첫 삽 뜨기. 처음에는 작은 발길질에 흙이 날리고 소나기에 금세 웅덩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겹 한 겹 노가다를 쌓아올리다 보면 에베레스트는 못 되더라도 밥 먹고 기분 좋게 산책할 수 있는 뒷동산쯤은 되어있지 않을까. 변화는 느리지만 거대하게 온다.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수많은 처음들은 어느새 겹겹이 쌓여 나라는 사람의 풍경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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