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에 칵테일

피곤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by 정리

“언니, 눈빛에 힘이 있어요.”

스물세 살쯤 되어 보였다. 까만 단발에 뽀송한 얼굴로 가끔씩 툭툭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사람. 그는 인생 300년은 산듯한 걸걸한 말투로 샷 잔에 담긴 리몬칠로를 세 잔째 원샷했다. 웃긴데 기분 좋았다. 거의 초면인 사람이라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도 못 했던 사람에게 듣는 내 인상평가였다. 와 그 말 진짜 기분이 좋아요. 일기에 꼭 쓸게요, 그랬다. 낄 생각 없었던 칵테일 학원 쫑파티에서 나눈 토막 대화들. 역시 사람은 먼발치에서 봐서는 모른다. 물론 가까이서 봐도 잘 모르지만.


“은정씨도 한잔 하고 가실 거죠?”

칵테일 이론 수업이 끝나고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어보는데, 원장선생님이 묻는다. 수업 마치고 조주기능사 실기시험을 치른 학생들끼리 쫑파티가 있다고 했다.


“아니요 저는 가보려고요.”

마스크 속으로 멋쩍게 웃어 보였다. 피곤했다. 회사 끝나고 주 2회 오는 칵테일 학원. 그것도 출석보다 결석이 많아서 이번 실기시험은 접수해놓고 스킵했던 참이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대화 소재를 찾느라 피곤할 것 같았다. 콜린스 잔에 담긴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바 스푼으로 휘저으면서, 슬쩍 사람들을 둘러봤다. 하나 둘 차려지는 안주 상과 수제로 조주 되는 술 주전자들을 보면서, 그래도 한 번만 더 물어봐 주면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스물서너 살쯤일 줄 알았던 그는 고3이었다. 조주기능사는 그래도 쉬운 편이라며 시큰둥하게 육포를 뜯었다. 학교가 관광 쪽이어서 조리기능사도 이미 있다고 했다. 칵테일은 왜 배우게 됐냐고 묻자, 언젠가 가게를 차릴 거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복어조리기능사 시험을 치는데, 살짝만 건드려도 독이 터져서 살 떨렸다며 복어 뜨는 시늉을 해 보였다. 와 멋있다. 그럼 칵테일에 복어가 안주로 나오는 건가? 가게 차리면 꼭 연락 달라며 누군가 '짠-!'을 외쳤다.


"은혁씨는 원래부터 이름이 은혁이었어요?"

"아뇨, 원래는 은수였어요.”

취해서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이었는데, 진짜로 개명한 거였다니! 들어맞은 촉에 뿌듯해하며 은혁씨가 새로 만들어 온 술을 한 잔 받았다. 뭐랑 뭐를 섞은 거라는데 어쨌든 콜라 맛이 났다.


"오~ 대박!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왠지 그럴 거 같았어요. 이름이 너무 잘 어울려서 자기가 지은 건가 했는데."

그는 칵테일 시범조교로 자주 불려 갔다. 마르고 긴 팔로 쉐이커를 흔들 때마다 뭔가 단단히 다짐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게 꼭 유노윤호 같았다. 술 주전자가 빌 때마다 열정적으로 새 술을 채워오는 것도. 자기소개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하자, 은혁씨는 자기도 글을 쓴다며 눈을 반짝반짝했다. 은수라는 이름도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칵테일 만들 때는 은혁씨 하고, 글 쓸 때는 은수씨 하면 안 되나?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미성년자가 술 마셔도 돼?"

엄격한 척 놀리는 질문에, 내 옆자리에서 열심히 윙을 뜯던 남학생은 부모님께 허락 맡았다며 웃었다.

"왜요 왜요? 몇 살인데요?"

"2004년 생이래요."

"헐! 2002년 월드컵도 못 봤겠네!"

짠-만하겠다고 수줍게 웃는 얼굴에 대고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해버렸다. 실습 때 기주나 가니쉬(장식)를 틀리면 정확히 짚어주던 친구가 미성년자였다니, 왠지 배신감이 들었다. 그는 10시 반쯤 되자 통금이 있다며 떠났다.


자리에는 몇 사람이 더 남아있었다. 여행사 마케터, 록 페스티벌에서 칵테일 만드는 알바를 했던 사람, 필리핀에서 살다 온 스무 살 원빈씨 등. 뒤통수만 보고 지나칠 뻔했던 사람들과의 대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서울역 환승센터에서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쐤다. 피곤한 걸 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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