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급 다이어리

위로는 과거의 나에게 받는게 짱이다.

by 정리

다이어리를 세 개 쓴다. 다이어리를 나누는 기준은 타인에게 공개 가능한지 여부이다.


첫 번째. 스케줄러 & 영감 다이어리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닌다. 손바닥만한 먹색 다이어리로 주로 하루 일정을 관리한다. 하루를 보내면서 인상깊게 와닿았던 것들도 일정 안에 기록된다. 이를테면 출근길에 본 장면, 점심먹다 나누었던 대화, 영화와 드라마의 장면이나 대사, 유튜브 영상 아래 달린 드립 댓글 등. 그날그날 마음에 걸린 것들을 수집하는 용도. 가끔 기가막힌 컨셉을 발견하면 드릉드릉한 감상을 적어둔다. 나도 자주 꺼내 보고 남이 봐도 상관 없는 수준의 내용들이 적혀있다. 내가 받은 인상들은 언젠가 내 아웃풋이 된다.


※2급 다이어리, 대외용

내가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솔직히 남들이 일부러 봐줬으면 싶을 때도 있다.



두 번째. 상철 제본된 무지 노트

아무데나(주로 손 닿는 곳) 둔다. 첫 번째나 세 번째 다이어리로 가는 중간노트로, 펜과 폰트에 상관없이 휘갈겨 쓸 수 있는 낙서장이다. 펼치면 갑자기 오픽 대본이 나오고, 크림브륄레 레시피가 나오기도 하고, 빌려 읽은 책에서 맘에 들었던 구절이 나오기도 하고, 커피잔 바닥 자국이 나오기도 하고, 군데 군데 찢어진 페이지도 있다. 모든 장이 서로 관계 없다. 상철(위로 넘기는 노트)로 쓰는 이유는, 쓰다가 손에 스프링이 걸리는게 싫어서. 노래 가사나 시 옮겨 쓰기 좋고, 가로로 눕히면 스토리보드나 역사 연표 그리기도 좋다.


※3급 다이어리, 조건부 공개

딱히 보여주고 싶진 않다. 수면바지 입고 밖에 나가는 느낌. 막 펼쳐서 쓰기 시작한 장만 공개 가능하다.



세 번째. 1급 기밀 다이어리

마음이 바닥 칠 때 꺼낸다. 일명 천국와 지옥 다이어리. 작성 주기는 보통 2개월에서 잦으면 2주. 울고 싶을 때나,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날 때,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만큼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 아니면 나도 내마음을 알 수 없을 때. 마음을 배설하고 정돈하는 용도.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미움과 사랑이 두서없이 난무한다. 내밀한 인생 기도나 비전도 적는다. 그런데 쓰고나면 아무리 지옥같던 마음으로 대충 천국 근처에 가 있다. 만약 쓸때 천국같은 마음이었다면 흥분을 가라 앉히고 상황을 만끽 가능한 상태가 되는 거다. 그래서인지 다시 펼쳐 보는 일은 잘 없는 것 같다. 글로 풀어내는 자체로 문제가 뭔지 파악되고, 감정의 밑바닥을 짚고나면 해결할 의지가 솟기 때문에. 울면서 쓰지만 '아 어차피 해결될거'라는 변태같은 헛웃음이 같이난다. 문제 삼았던 것은 언젠간 해결 되더라. 나중에 그 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청소하다가 이 다이어리를 발견하면 시간 순삭. 청소는 다음 기회에...

아무래도 위로는 과거의 나에게 받는게 짱이다.


※1급 다이어리, 비공개

기밀이지만 유효기한이 있긴 하다. 그때 적어둔 상황과 감정을 완벽히 소화했을 때 더이상 기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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