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꽃 발차기

by 정리

“밥 먹자, 아니 술 먹자”

3년 전. 3번째 카피라이터 인턴을 할 때였다. 출근한 지 일주일 되던 날 SOS를 쳤다. 가로수길 카피라이터 김오빠와 뱅뱅사거리 카피라이터 김언니에게. 둘 다 갓 신입사원이었다.


인턴 깍두기는 광고회사 회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10년 차 선배들의 화려하지만 심플하고 단단하지만 유연하고 드라마틱하지만 설득력 있는 키노트 실력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꼈던 거 같다. (신입사원인 지금도 여전히 느끼고 있다. 감사하다. 잘하는 팀에 있다는 뜻이니까.)


퇴근 후 김언니는 양재역 뒷골목 숨은 맛집이라며 이자까야로 안내했다. 어둑한 골목을 걸으면서 요즘 맥주 광고 모델 얘기를 했던 거 같다.


뭘 먹었더라? 바(bar)로 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뭔가 식감이 되게 시원하고 신선한 걸 먹었다. 가게의 조도와 분위기, 사케, 그리고 딱 하나만 기억난다. 그다음 날 바로 동네 문화센터에 수영을 등록하게 만든, 김언니오빠가 쌓아 올린 대화.




김오빠: “수영하면 생각 정리된대. 우리 회사 대표님도 수영으로 유명해. 나도 하고 있어. 아이디어 좀 나올까 싶어서”


나: “그래? 산책 같은 건가?”


김언니: “물 속에 있는 느낌 좋아. 척추가 한 번도 안 쉬잖아. 앉아 있거나 서있거나, 심지어 누워있을 때도 중력을 받으니까. 근데 물속에 있으면 달라. 유일하게 무중력 상태니까. 척추도 쉴 때가 있어야지.”


나: “헐... 미쳤다. 지구에서 중력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네”



크... 수영은 그런 거였어! 박수쳤다. 당신들 이런 발견으로 카피라이터 월급 받는구나.


그날도 그 월급으로 얻어먹었다. 내가 돈 벌면 꼭 갚을 거야. 언니 오빠는 어? 아무 때나 어? 막 사줄 거야. 허세 부리던 인턴1과, 회삿돈으로 이대로 집까지 택시 타버릴까 호기롭게 말하던 신입사원1,2였다.



새벽 수영 초급반은 수강신청이 치열하다. 자의 반 타의 반 작심삼일 직장인들과 새벽잠 없는 할머니들이 나오다 말다 하며 서로 회전율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자유형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아침마다 반년을 오고 갔다. 못 나간 날을 솔직하게 센다면 세 달을 배운 셈이다. 광고회사 선배들은 그런다. 아이디어는 앉아만 있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고. 수영은 인풋을 채우려는 인턴의 발버둥 중 하나였다.

수영장에서의 발버둥은, 솔직히 재밌진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여기까지만 할 거다. 가끔 TV에서 자유자재로 잠영을 하고 철인 삼종 경기에 나가 한강을 맨몸으로 건너는 걸 보면 더 배우고 싶긴 하지만.


새벽 3시 목욕탕 배영 선수. 가끔 이상한 시간에 따릉이를 타고 사우나에 갈 때가 있다. 그날의 탕 청소가 막 끝난 깨끗한 첫 탕에 몸을 담그면, 노곤하게 잠들듯 말듯한 기분이 드는 게 좋다. 그렇게 이 탕 저 탕 인간 티백이 되어 이런저런 생각을 추출한다.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씻는다. 심장이 덜컥하는 기분이 싫어서. 냉탕은 영원히 안 들어갈 거라고, 꽤 오래 마음먹었었다. 수영을 배우고 달라졌다. 냉탕이나 수영장이나 물 온도는 똑같잖아?


여전히 물안경이 없으면 숨이 안 쉬어지고, 바닥에 발이 닿고 벽에 손이 닿아야 수영할 수 있는 몸이지만 수영은 여기서 홀딩. 이 정도로도 재밌다. 냉탕 수영의 맛과, 새벽 수영을 마치고 덜 말린 머리로 나와서 먹는 베이컨 토마토 맥모닝, 입천장을 두들겨 패는 시원새콤한 자두칠러 맛이 죽여준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P.S)

“평영을 할 땐 발차기로 물꽃을 만드세요.”

우락부락한 수영 선생님이 말랑말랑한 표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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