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리 Sep 27. 2021

#.광고회사 면접장에서

탈락이지만 합격입니다.

죽을 뻔하지 않고도 주마등이 재생될 때가 있다.

어떤 일은 가끔 동영상으로 찍은 듯이 생생하게, 심지어 냄새와 그날의 분위기까지 기억 속에 남아있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모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를 뽑는 3차 면접장이었다.


내 앞에는 면접관 1,2가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내 왼쪽에는 여자1, 오른쪽에는 남자1이 앉아 있다.

자기소개해보세요, 같은 식상한 질문과 식상한 답변들이 벌써 두세 번 오갔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지원자)는 한편이 되어 지루해하는 면접관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면접관: 친한 친구 있어요? 소개해주세요.


광고회사 다운 질문이었다. 남자1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친구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 팔을 다쳐서 깁스를 하게 됐는데, 며칠 동안 자취방에 찾아와서 머리도 감겨주고 물심양면 자신을 보살펴 줬다는 얘기였다. 여자1은 요즘 자주 만나는 동아리 친구를 말했다.


: 생일 때마다 손목시계를 선물해 주는 친구가 있어요. 벌써 세 개째인 거 같은데, 오늘도 차고 왔거든요. (손목을 보여주며) 중요한 일이나 잘하고 싶은 일 있을 때마다 부적처럼 차고 와요. (나는 기독교 모태신앙이다)

이름은 이수정인데요. (왜인지 갑자기 벅차서 실명을 부르고 싶었다. 수정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다.) 오랜만에 만나도 새벽 두 시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예요. 사실 안 좋은 일을 위로하는 건 누구한테나 쉽게 해 줄 수 있지만, 좋은 일을 순수하게 축하해주는 건 어렵잖아요. 근데 이 시계 준 친구는 저한텐 그런 친구예요.


(이후 몇 개의 질문이 더 오간다.)


면접관: 좋아하는 광고 카피 있어요?


카피라이터 지망생에게는 빈출 질문이었다. 남자1은 편의점에서 본 맥주 광고 포스터 카피가 좋았다고 했다.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이용한 카피였다. 면접관이 서류를 넘기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게 말장난이지 카피인가?

그래, 명색이 광고전공잔데 이때를 위해 준비한 게 있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카피 한 줄을 무심한 척 꺼냈다.


: 되게 옛날 카피인데요, 롤스로이스 카피 좋아합니다.

[COPY]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롤스로이스에서 가장 큰 소음은, 전자시계 초침 소리뿐이다.


면접관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고전 카피를 꺼내 들다니 요놈 공부 좀 했네? 같은 눈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다.)

자동차가 소음이 없다는 말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카피라이터가 이런 절묘한 발견을 하는 일이라면 나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결 분위기가 풀어진 느낌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다. 2)



면접관: 카피를 물어봤으니 조금 식상하지만 커피를 물어볼게요. 좋아하는 커피 있어요?


여자1: 샤로수길에 제가 자주 가는 개인 카페 XXX인데요. (서울대생일까?) 핸드드립 커피를 잘합니다.

남자1도 캡슐커피 브랜드부터 다양한 원두 이름들을 댔다. 앗… 카페 알바를 오래 하면서 몸으로 맛으로는 커피를 알지만, 머리로는 커피를 잘 모른다. 진짜 좋아하는 커피를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혹시 투썸플레이스 자주 가세요?

면접관: 풉

웃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프랜차이즈 이름이 나온 게 의외였는지 면접관 한 명이 웃었다. 됐다. 그래 이건 된 거다.

: 거기에 '시그니처 라떼*'라고 있거든요? 되게 고소하고 맛있어요.

면접관: 거기가 커피가 맛있나? (호기심과 의구심이 섞인 말투였다)

: 네. 제가 일본 여행 갔을 때 한참 길 헤매다가 들어간 카페에서 라떼를 시켰는데요. 앉은자리에서 두 잔을 원샷한 적이 있어요. 그 맛을 못 잊고 지내다가 똑같은 맛을 찾은 거예요. 투썸에서요. (이때부터 진심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생크림을 넣는대요. 처음 드시면 조금 당황하실 수도 있어요. 종이컵 만한 데 주거든요. 근데 딱 맛있게 먹을 만큼만 주는 거더라고요. 라떼 좋아하시면 꼭 드셔 보셔야 돼요. 엄청 고소해요.

면접관(옆에 앉은 면접관을 보며) 근처에 투썸 있나?


(개인별 질문이 몇 개 더 오간다.)


면접관: 추천하고 싶은 나만의 장소나 아지트가 있는지.


여자1이 안전가옥 건축물을 얘기했다. (오 서울에 그런 곳도 있구나, 나도 가봐야지.) 아는 게 많은 사람 같았다.

남자1도 자신 있게, 그러나 내 기억엔 남지 않은 자신만의 아지트를 말했다.

어디를 말할까. 나한테 그런 건 없었다. 학생 때는 학교 도서관 4층 창가 자리를 좋아하긴 했는데… 마침 면접이 있는 주에 <오늘 날씨는>이라는 전시를 봤었다. 전시보다 인상 깊었던 건 장소였다. 벨기에 대사관을 개조한 미술관이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육중한 현관문을 온몸으로 밀어서 들어가면 높은 층고에 대리석 바닥이 깔려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스테인글라스 창에 시간마다 빛이 다르게 들어오는 곳.


: 서울에 딱 그 블록만 유럽을 떼어다 놓은 거 같더라니까요. (유럽 가보기 전이었다.) 그래서 요즘 제 아지트는 사당역 남서울 시립미술관이요. (사실 딱 한 번밖에 안 가봤다.)



면접관: 그럼 마지막으로 카피 한 번 써봐야죠. 방금 말한 장소를 한 줄로 소개하는 카피를 써 봐요. 시간 얼마 없으니까 빨리. 누구부터 할래요?


여자1의 얼굴에서 다른 장소를 말할 걸 하는 표정이 스쳤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종료시간은 다가오는데 마지막까지 헷갈리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끝나는 종이 치자마자 에라 모르겠다 OMR 카드에 아무 번호나 찍어야 할 것 같은 이 기분. 아! 맞다! 최근에 제주맥주가 런칭하면서 연남동 연트럴 파크에서 캠핑 컨셉으로 시음 행사를 했었지. 발칙하게도 여기가 '서울시 제주도'라고 우기면서. 이걸 패러디해볼까.


: 서울시 벨기에


면접관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스친 것 같았다. 결과는 합격이었으니까. 그래서 내 자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그 해를 마지막으로 그 광고회사는 더 이상 신입공채를 뽑지 않았다.

탈락의 상처는 꽤 오래갔다. 얼마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친구와 할로윈 의상까지 준비했던 홍콩행 항공권도 취소했었는데. 광고하는 친구들 모임에도 한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이불을 팡팡 차면서 내가 더러워서 카피라이터 안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가끔 무당처럼 말할 때가 있다.

그날 면접 대기실에 있던 인사팀 담당자는 끝날 때까지 이 얘기를 반복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신 분들은 어쨌든 들어오게 될 거예요. 계속하기만 한다면요."


2년 전, 지금 다니는 회사 본부장님도 나에게 똑같은 얘기를 해줬다. 최종면접에서 날 떨어트리면서.

"계속해보세요. 지치지 말고 계속해보세요." 확신에 찬 그 어투와 눈빛은 한동안 마음 어딘가에 콕 박혀있었다.


뚝딱대는 모습에 가려졌지만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그들은 스치듯 미리 봤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정말 카피라이터가 됐으니까.


그러다 나중에 그날을 복기해봤다. 아, 그래서 떨어진 거였구나. 그때의 나는 너무 붙고만 싶었구나. 최종면접에 간 나는 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를 보여주려고 간 게 아니라, 합격을 사려고 줄 선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였다.



면접은 짝사랑이랑 비슷하다. 잘 보이려고 할수록 못생겨 보인다. 나답지 못하게 엉거주춤 삐걱삐걱거린다. 반대로 나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발산된(?) 매력을 느끼고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비슷하다. 될 대로 되라지, 힘 줄 때는 안 되고 힘 빼면 된다. 인생에 필승법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마음가짐은 필승법에 가까울 때가 많다. 내가 통과한 면접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열렬히 좋아하지는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혹시 조금 뚝딱거리는 나를 발견했다면, 조금만 참아주면 좋겠다. 그건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준다면 원래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아니다, 숨기고 싶지만 뚝딱거리는 것도 내 모습이 맞다. 인정합니다.


수많은 탈락 끝에 이제는 안다. 탈락은 탈락이 아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타이밍에, 나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는 중인 거다. 내 인생 드라마 애청자인 ‘신’이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며 슬쩍 끼어든게 분명해. 탈락 후유증을 견디는 자기합리화일수도 있지만, 나는 운명론자니까. 만날 사람은 만나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믿는다. 시차만 조금 있을 뿐.



*투썸플레이스 '시그니처 라떼'는 지금은 단종됐다.


뻔뻔한 질문 #9. 인생은 타이밍
열렬히 짝사랑 했던 대상이 있나요? 어떤 점을 사랑했나요?
열렬히 부러워하고, 질투했던 대상이 있나요? 지금은 어떤가요?
이전 08화 이름의 느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