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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Dec 05. 2021

와인은 포도맛이 아니다

와인에 대한 단상들

거짓말 치지 마요.

어떻게 술에서 초콜릿이랑 블랙체리랑 블루베리랑 후추 향이 한 번에 나요?

와인잔에 코를 박고 흔들흔들해봤지만, 오크통 냄새와 이름 모를 붉은 과일향만 조금 나는 것 같았다.



처음 와인에 접근한 건 대학교 2학년 때, <와인과 칵테일> 수업에서였다.

교수님은 회색 수염을 기른 풍채 좋은 프랑스인 남자였는데 한국어를 잘 못하셨다. 직접 제작한 교재 제본에는 가끔 포도 품종과 산지가 양재와당체나 개봉박두체로 등장했다. 까베르네 소비뇽 - 소비뇽 블랑 - 피노누아 - 피노그리... 끝말잇기 같은 이름들이 그림같이 적혀있었고, 음 와인은 언제 마셔보는 거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역시 술은 마시면서 배워야지! 합리화하면서 수업을 째고 동아리에서 술을 마셔 재꼈고, 그렇게 첫 와인 수업은 F학점을 받고 끝이 났다.
 


두 번째(라고 쓰고 진짜 처음) 시도도 학교였는데, 김포공항 근처 호텔스쿨에서 여는 와인 수업이었다.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주 2회 수업을 토요일 하루에 압축하는 바람에 시간으로만 따지면 야자 안 하는 고등학생 스케줄과 비슷했다. 수업은 하루에 총 여섯 종류의 와인을 맛보는 루틴이다. 오전에 이론 수업을 2교시 듣고 나면, 각자 와인잔을 3개씩 챙겨서 세 종류의 와인을 시음한다. 점심식사 후 다시 이론 수업 2교시, 그리고 새로운 와인을 3잔 시음하는 식이다. 공복에 와인 3잔, 아 맞다 나 취하면 자는데.
 



주말 아침 첫 끼로 와인을 연달아 세 잔 마셔봤는가?

식도부터 위장까지 와인이 떼굴떼굴- 떽떼굴, 포도 모양으로 찰지게 들어간다 쭉쭉- 쭉쭉쭉.

그리고 빙글빙글 웃음이 난다. 나만 취하나 봐. 다들 멀쩡해 보여. 점심식사는 도시락을 싸오거나 호텔 안에 있는 편의점을 이용해야 하는데, 나는 편의점에서 제로콜라와 샌드위치나 삼각김밥을 산다. 그리고 회사에서 빌린 슬램덩크를 한 권 끼고 산책로에 있는 벤치로 들어간다. (슬램덩크 정주행은 올해 목표 중 하나다). 만화책을 읽는 둥 마는 둥, 삼김을 씹는 둥 마는 둥, 빙글빙글 뒹굴뒹굴하다가 오후 수업에 들어간다. 꾸벅꾸벅 졸다보면 어느새 다시 와인 세 잔이 눈앞에. 마시면서 배울 줄 알았던 술은 취해서 절반만 배우고 있었다.



와인은 포도로 만들지만 포도맛이 아니다.

자갈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햇볕에 잘 말린 조약돌 향이 스쳐 지나간다. 송로버섯과 함께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한 모금 머금고 먼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버섯향이 나기도 한다. '떼루아'는 와인의 맛과 향을 만드는 모든 환경을 말한다. 토양, 태양, 기후, 바람, 포도 품종같은 자연환경부터 양조장(와이너리)의 재배 스타일까지. 같은 품종의 포도도 날씨에 따라 당도가 달라지고 양조장의 숙성 스타일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와인 한 병은 딱 그 해의 날씨운, 날씨가 만든 포도의 성격, 양조 가문의 손맛이 담긴 타임캡슐이다.



같은 와인도 다른 와인이다.

언제, 어떤 음식과, 누구와 함께 마시는지에 따라 다른 맛이 나니까. 하물며 공장 소주 처음처럼도 고단한 날에는 단맛이 난다. 술은 맛이 아니라 기분으로 마시니까. 마셔본 와인도 처음 마셔본 것 같을 때가 있다. 솔직히 아직 와인 맛이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와인 선생님이 그랬다. 여러분의 와인 생활은 종강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포도를 배우면서 귤을 생각했다.

귤화위지. 같은 귤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사람은 환경이 만든다는 당연하지만 무력해지는 말. 어디서 나서 누구를 만나며 자랐는지가 그 사람의 분위기를 만들고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의 부족한 떼루아를 떠나 더 좋은 떼루아를 찾아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다. 물론 뿌리를 옮기는 건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귤이 아니다. 포도도 아니다. 내 뿌리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옮길 수 있고 타화 수분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나.




뻔뻔한 질문 #12. 나를 이루는 것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그 성분은 몇 퍼센트일까요?
성분들의 농도를 바꾼다면? 지금은 없지만 갖고 싶은 다른 성분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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