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가장 비싼 안경
샀다. 안경.
원래 96만 원이다. 회사에서 받은 신세계 상품권 십만 원 쓴 걸 포함하면.
우리 팀 국장님이랑 같은 브랜드 안경이다.
쓰면 카피라이터 느낌 나는 그런 안경. 그래서 빌려 써봤더니, 이건 뭐지 마법인가? 코에 닿은지도 귀에 걸린지도 모르게 가벼웠던 안경. 근데 가격 듣고 ‘안경 주제에... 그건 선 넘었지...!’ 했던 그 안경.
안경잡이 인생 18년 차지만,
내 생에 안경 낀 시간은 다 합쳐도 1년이 될까 말까다.
깨어있는 시간은 종일 콘텍트 렌즈를 끼고 있다.
요즘 퇴근하고 종종 학교 도서관에 가는데
아이패드 보다가 책 보다가 폰 보다가 다시 아이패드 보다가, 갑자기 느낌이 빡 왔다.
‘아 때가 됐구나. 안경에 돈 쓸 때’
나한테 안경은 시력 보조기구가 아니었다.
페이스 오프 가면이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 야자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양치하는 친구와 세면대 거울로 눈이 마주쳐서 내가 웃긴 표정 지으면서 오바쌈바 난리부르스를 췄는데, 친구가 나를 못 알아봤다. 화들짝 나를 알아보는데 30초가 걸렸지. 안경 써서 못 알아봤다며 내가 아는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 찰나에 초면을 대하듯 우정을 걷어낸 친구의 무정한 표정이 지금도 가끔 반복 재생된다. ‘(-_-)’
그날 이후로 안경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잠깐 걸치고 벗는 샤워가운 같은 게 됐다. (집에 샤워가운 없음)
머리맡에 안경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자다가 깔아뭉개도 그러려니. 코받침이 삐뚤어져서 돋보기안경처럼 코끝까지 흘러도 부지런히 올려가며 썼고, 안경다리의 나사가 빠져서 죽은 파리 다리처럼 떨어져 나가도 대충 끈으로 엮어서 쓰는 날 보고 동생이 혀를 찼다. 그러느니 하나 사!
샀다.
한 번도 아껴서 쓴 적 없는 안경을 거의 백만 원을 주고.
사기로 마음먹은 바로 다음 날 사러 갔다.
가는 길에 맘속으로 계산기 때렸다.
10년은 쓸 거니까. 1년에 10만 원으로 치면 되지.
이렇게 된 거 윤여정 쌤처럼 탈부착 선글라스도 같이 맞춰야지. 가을에 부산국제영화제 갈 때 야무지게 쓰면 되겠당. 이거 생각할수록 남는 장사잖아?! (기적의 계산법)
그동안은 안경을 대충 오래 썼다면,
이번에는 자주 오래 써보려고 한다.
비싸게 샀다고 마음가짐이 달라진 게 웃기기도 하지만
실은 이건 백만 원짜리 다짐이다.
이제는 눈도, 안경 쓴 내 얼굴도 아껴주겠단 비장한 다짐.
뻔뻔한 질문#12. 소비
합리화 소비 VS 합리적 소비
누가 뭐래도 ‘이건 정말 잘 샀지.' 싶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