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서랍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영어로는 뭐라고 쓰지?"
광고 카피를 영어로 번역해야 할 때가 있다. 광고를 맡긴 클라이언트가 외국인인 경우다. 카피라이터가 무조건 영어를 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외국계 광고회사는 영어를 잘하는 직원들이 많다. 카피라이터는 잘 쓴 카피를 넘겨만 주면 된다. 영어로 다시 번역되어 온 카피를 받고 생각했다. 아니 독해했다. 음 아는 단어네. 근데 이 뉘앙스가 맞는 건가? 또 작심세달 버튼이 눌렸다. 아, 나도 이제 영어 그만 못하고 싶다. 물론 외국물 한참 먹고 온 이 사람들처럼 하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그래도 다음번에 영문 카피를 받았을 땐 오늘보다 섬세하게 읽고 싶어졌다. 그렇게 퇴근 후 주 2회 영어 회화를 시작했다.
서울의 밤 8시 30분, 선생님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는 점심 12시 30분. 수업 방식을 상의하던 중에 우리는 매주 다큐멘터리 한 편을 함께 보고 스몰 토크하기로 했다. 줌 화면 안의 영어 선생님이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댕- 댕- 노트북 모니터 안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성당 종소리가 새삼 이국적으로 들린다. 하루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의 에피소드인 '명상'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아래부터 따옴표 안의 말은 다 영어로 번역해서 읽어주시길 바란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불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으니까요. 모든 인간은 불안을 느껴요. 불안은 마음의 문제예요. 자세히 말하면 관점이요. 나를 둘러싼 상황을 받아들이는 관점. 그들(다큐멘터리 속 승려들)은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명상을 처방해요. 나에게 명상은 기도예요. 나는 Believer거든요. 내 기도에는 격식이 없습니다. 눈을 감거나 두 손을 모으지도 않아요. 단지 내 뇌로 생각합니다. 신을 생각해요. 나에게 명상은 신을 생각하는 거예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자주 신을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숙제를 만났을 때, 짧은 시간 안에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야 할 때. 광고회사는 매일 회의가 있거든요. 마감 시간 전까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이디어를 내야 해요. 회의에 아무것도 없이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시간은 다가오지, 내 키노트(PPT) 페이지는 비어있지, 온 우주가 나에게 아이디어를 내려주기를 바라며 신을 찾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요. 다른 사람이 보면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기도하는 중입니다. 눈 뜨고 기도 하는 거죠. 신이시여 나를 쪽팔리게 하지 마시옵소서.”
"어떤 벌레는 위기를 느끼면 IQ가 340이 된다고 하죠.
비슷할지도 몰라요. 순간 몰입, 신기한 경험이에요. 온몸에 힘이 빠지고 심장박동이 편안해지거든요. 그리고 머릿속에서 서랍들을 뒤적뒤적 열어볼 수 있게 됩니다. 서랍이 몇 개냐고요? 그건 그때그때 달라요. 아마 평생에 걸쳐 빌트인 되고 있는 중이니까 수백억 개쯤 되지 않을까요? 어떤 서랍은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왁-! 나 여기 있었어!' 소리치면서 갑자기 열리기도 하거든요. 물론 불안을 의식하면 한 개도 안 열리고 그날 회의는 종 치는 겁니다. 근데 이 서랍은 열어본 그 감각만 잘 기억하면, 아무리 쫄리는 상황에서도 내 맘대로 열어볼 수 있게 돼요. 몸이 기억하거든요. 더듬더듬 손잡이가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만약 내가 죽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면, 아 쟤가 신을 한 오백 번쯤 불러재꼈나 보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혹시 선생님도 불안을 벗어나는 선생님만의 Ceremony가 있나요?"
뻔뻔한 질문 #18. 불안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요?
불안을 탈출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