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해보고 조리해봐도
집에서 3초 만에 불멍 하는 법
티티티 틱- 가스레인지를 켠다.
프라이 팬이 반 정도 차도록 식용유를 붓는다.
후추와 튀김가루에 저며 놓은 가지를 프라이 팬에 넣는다.
짝짝 짝짝짝- 중불에 가지를 튀겨낸다.
가지가 알아서 튀겨지는 동안, 일렁일렁 가스레인지의 파란 불꽃을 쳐다본다.
과연... 완성될 가지 토마토 파스타는 맛있을까?
불 앞에 있으니까 좀 더운 거 같기도. 튀김 소리는 꼭 박수소리 같네. 아니 비 오는 소리 같나.
건너편 싱크대를 쓰는 사람 프라이 팬에는 물이 튀었는지 파다다닥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토요일 아침 9시가 되면 출근하는 마음으로 3시간 동안 불 앞에 서 있는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불멍? 멀리 갈 필요 없다. 가스레인지 앞 파란 불꽃으로 멍 때리기는 충분하다.
요리는 절대 안 배울 걸?
브런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글 쓰는 브런치 말고 먹는 요리, 이태리 브런치다. 수업은 3개월 과정이었고 사실 지금은 종강했다.
나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사람이라, 뭔가 경험하기를 결정할 때 하나만 남는대도 시작하는 편이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도 배움이라고 생각하는 편)
근데 이상하게 요리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겼다. 차리느라 먹을 체력이 안 남는 게 제일 큰 이유였다.
나보다 쉽게, 싸게, 빠르게, 그러고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식당들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배울 필요가 있을까.
그러다 퇴근하고 몇 주 째 습관처럼 고봉민 참치김밥을 욱여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현타가 왔다.
아, 이제는 잘 차려먹을 때가 되지 않았나. (오해 금지. 고봉민 김밥 잘한다. 돈가스 김밥 추천)
지난 4월에 회사와 30분 거리로 이사를 했다. 이사는 새 사람이 되기에 참 좋은 핑계였다. 이사하면 과일도 많이 먹고 샐러드 위주로 건강하게 차려먹어야지! 샐러드는 그냥 먹으면 맛없으니까, 어디 다양하게 샐러드 차려먹는 법 가르쳐 주는 곳 없나? 그래 브런치를 배워보자! (사실 그냥 유튜브 보고 따라 하면 된다. 가성비 떨어지는 포인트 2)
브런치는 가볍지 않았다. 굉장히 본격적이었다.
요리를 배우고 생활에 두 가지 디테일이 달라졌다.
디테일 하나. 맛있는 걸 조금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됐다.
*마늘맛 입히기. 팬에 재료를 볶을 때, 기름에 마늘 같은 향채를 먼저 볶아서 다음 재료에도 풍미 더해주기. (기름에 튀긴 마늘은 풍미가 오백 배쯤 좋아진 감자튀김 같다.)
*샐러드 업그레이드. 마른 팬에 느타리, 새송이, 양송이버섯을 수분이 날아갈 정도로 구워서 샐러드 고명으로 얹어주기. 고기인듯 버섯인듯 쫄깃한 샐러드가 된다.
*새우 재벌 크림 파스타. 면 대신 새우를 면만큼 넣고 야채와 함께 크림소스로 볶아주기. 나는 떡볶이도 떡 빠진 볶이가 좋으니까.
*밖에서 파는 요리 코스프레. 집에서 만든 파스타와 샌드위치도 파마산 치즈를 박박 갈아서 눈꽃처럼 뿌려주면 파는 요리 같아 보인다. 여기에 어린잎이나 루꼴라를 뜯어서 슬쩍 올려내면 집들이 손님들에게 박수도 받을 수 있다(뿌듯). 창의력은 요령을 딛고 자라는 걸까. 이대로 쩝쩝박사가 되어버릴지도!
디테일 둘. 손이 빨라졌다. (많아진 건가)
누군가 요리의 진짜 완성은 설거지라고 했다. 요리를 시작하는 동시에 치운다. 재료를 손질하면서 치우고, 조리하면서 그릇을 준비하고, 완성된 음식을 그릇에 옮기며 조리도구들을 설거지한다.
요리를 배우고도 달라지지 않은 건,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
요리조리 해봐도 음식은 역시 남이 해주는 게 최고다.
잘 먹었습니다. 인사만 해도 되는 편리한 식사가 여전히 더 좋다.
맛있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서 숟가락 들 정도의 노동만으로 맛있게 먹기.
식사는 식탁의 민낯을 덜 볼수록 꿀맛인 것 같다.
뻔뻔한 질문 #19. 취미
살면서 절대 배울 일 없다고 생각한 게 있나요?
배워보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