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렁뚱땅 우당탕탕 조주기능사
"아 맞다, 은정이 조주기능사 자격증 있잖아."
"조주? 주조기능사? 그게 뭐예요?"
"(공중에 쉐이커를 잡고 흔드는 시늉을 하며) 칵테일 있잖아요, 그거 만드는 바텐더 자격증."
"우와~ 술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요. 솔직히 술맛은 잘 모르겠고요. 방금처럼 아는 척 하는 맛이 좋아서 땄습니다.
술자리에서 쭈뼛쭈뼛 자랑하면 기분이 좋그든요. 칵테일 마시는 것보다요. 크흐.
그러니까 저랑 술 마시게 되면 모른 척 한번 물어 봐주세요. 술자리 최고 안주는 아는 척 잘난 척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자랑하기도 멋쩍다. 이 자격증이 대단한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 때문에.
첫째, 벼락치기로 필기시험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문제은행 기출문제를 3개년쯤 돌리면 된다.
둘째, 실기시험 범위인 칵테일 레시피 40개와 술잔, 술병을 외운다.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시험 3일 전부터 백지복습을 시작해서 시험 전날 새벽 3시에 겨우 다 외웠다. 실기시험 접수비가 아까워서.
셋째, 시험장에서 랜덤하게 출제되는 3개의 칵테일을 7분 안에 치명적인 감점 없이 만들어 낸다. 운 좋게 까먹지 않은 레시피가 나왔다. 그렇게 기능사가 된다.
실기시험 날, 시험장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2인 1조로 시험을 치른다. 내 짝은 일요일인데도 교복을 입고 온 남고생. 관광고등학교 학생일까? 시험장에 들어가면 채점관 3명이 앉아있다. 바 안쪽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채점관은 편안한 마음으로 연습한 대로만 보여주면 된다는 말과 함께, 화이트보드에 조주해야할 칵테일 3개를 즉석에서 적었다. 백일장 같기도 하고 논술시험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네그로니는 만들기 쉽고, B-52는 비주얼 임팩트 때문에 까먹을 수가 없었고, 가장 적게 봤지만 들어가기 직전 단기기억에 욱여넣었던 바카디가 나와줬다. 바에 두 줄로 늘어선 술병 라벨을 빠르게 스캔하면서, 재료가 들어가는 순서를 생각했다. 타이머가 시작되자 갑자기 긴장됐고 마음이 분주해졌다. 잔에 넣어야 할 얼음을 쉐이커에 넣는다든지, 지거(칵테일 개량컵)에 술을 넘치게 따라서 바닥에 흘리는 술이 더 많다든지.
마지막 바카디에 들어갈 화이트 럼 병을 집는데, 갑자기 채점관 두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 손에 든 병을 보더니 채점표에 티 나게 뭔가를 적었다. 아차, 그냥 화이트 럼이 아니라 바카디 화이트 럼을 넣어야지.
"저 죄송한데 이 잔은 버리고 다시 만들어도 될까요?" 채점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캄파리를 넘치게 넣은 불타는 네그로니와 2,3층이 조금 화목한 B-25, 바카디(진짜최종)을 제출하고 숨을 골랐다. 시간이 아직 남아서 도마를 물에 헹구는데, 아 맞다 레몬 필. 썰어둔 레몬 껍질을 양손으로 쥐어짜서 네그로니 잔에 가니쉬(장식)로 털어 넣는 순간 "시간 다 됐습니다."
역시 B-25의 층 분리가 아쉬웠다는 피드백이 있었지만, 무사통과. 옆에서 같이 시험을 치른 남고생은 실격됐다. 시작하기 전에 손을 안 씻어서. (이 시국에!)
얼렁뚱땅 조주기능사. 만약 돈을 주고 칵테일을 마시러 갔는데 이따위로 우당탕탕 만들어 내온다면 분명 컴플레인 감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7분 안에 3잔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40개의 레시피는 만들며 마시며 내 몸 어딘가에 흡수되었다. 갑자기 술병이 많은 자리에 가도, 술병을 읽을 줄 알게 되었고 어떤 술을 골라서 얼마나 넣고 섞으면 먹을만한 맛이 나는지 아는 사람이 된 거다.
그러나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이태원 어딘가에서 자격증 없이 3년간 바텐터로 일한 사람보다 맛있게 능숙하게 칵테일을 만들어 낼 자신은 없다. 한 장짜리 얇은 자격증은 술 좀 아는 사람이라고 공인해줄 순 있겠지만, 그 뒤에서 보낸 시간의 밀도까지 보여주진 못한다. 자격증은 내가 아니다. 나를 구성하는 n분의 1조각일 뿐이다. 지분과 밀도의 차이. 마찬가지로 대학 간판도 내가 아니다. 회사 명함도 내가 아니다. 인스타그램 피드 조각들이 나의 모든 것이 아니듯이.
호크룩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는 영혼을 일곱 조각으로 쪼개어 호크룩스에 심어두었다. 불사의 몸이 되고 싶어서. 일곱 개의 영혼 조각이 모두 박살 나지 않으면 죽지 않는 거다. 나에게 조주기능사는 호크룩스였다. 나를 설명하는 한 가지 조각. 내 이름 뒤에 붙는 많은 괄호들 중 하나인 것이다. '이은정(바텐더)' 이 괄호가 없다고 해서 내가 죽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해서 내가 대단해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 명이지만 여러 명이다.
자아 쪼개기. 나는 앞으로도 자아를 조각낼 것이다. 어느 한 자아가 상처받고 기죽더라도 다른 자아가 다독여 줄 수 있도록. 다른 한 자아가 대단히 성공했대도 깝치다 추락하지 않도록. 건강하고 균형 있게 나를 길러나갈 것이다. 캐릭터 추가와 삭제의 반복으로 내 유니버스를 넓혀가는 것, 그게 사는 거 아닐까? 처음엔 솔직하지 못한 이유로 조주기능사를 준비했지만, 이제는 또 다른 자아들과 잘 섞여 새로운 맛의 내가 되었다. 칵테일처럼.
TMI) 내 외장하드들 이름도 호크룩스다.
뻔뻔한 질문 #20. 페르소나
나는 정말 한 사람일까?
나를 나눌 수 있다면 몇 사람이 나올까?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