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과수 박기원 박사의 과학수사 이야기, 범인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살인 사건
창원에서 주부가 피살되어 베란다 창고에 유기된 채 발견되었다. 마침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부인을 찾았으나 없어 집안의 여기저기를 찾아보던 중 베란다 창고에서 웅크린 채 숨져있는 처를 발견하고 바로 119에 신고를 한 것이다. 부인을 바로 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변사자에 대한 부검 결과 목이 졸려 숨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담당 형사가 사건 현장에 대한 감식을 의뢰하였다. 사건 현장의 혈흔이 사건 후 지워진 것 같아 현장에 대한 혈흔 검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혈흔 검출 시약, 증거물 채취 용구 등을 준비하여 바로 사건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해서 사건 현장을 관찰하였다. 부검 당시 본 변사자의 얼굴 및 이마에 난 상처로 보아서는 현장에 혈흔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혈흔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지워진 혈흔
창문 등으로 범인이 침입한 흔적을 찾기 위해 창문 틀, 창살 등을 조사 했지만 별다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즉, 현관문을 통해 들어왔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침입 흔적을 조사한 후 방, 거실, 베란다 등에 대한 혈흔 검사를 실시하였다. 혈흔 검사의 주안점은 어떻게 어느 곳에서 살해되었으며 시신을 어느 곳에서 어느 곳으로 이동했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범인이 원래 있던 혈흔을 닦았는지 여부도 주안점이었다. 혈흔 검사 결과 피해자가 살해된 것으로 판단되는 안방에서는 거의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안방을 나와서 거실을 따라서 계속 혈흔 검사를 진행했으나 마찬가지로 거의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으며 약간의 혈흔 흔적만 발견되었다.
아무리 목을 졸라 살해를 했다고 해도 혈흔이 너무 적게 발견된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의문은 베란다에 대한 혈흔 검출 시험 결과 풀리기 시작했다. 실험 결과 물이 내려가는 배수구 주위와 배수구 옆에 있던 마른 걸레에서도 혈흔이 검출되었다. 범인이 걸레로 사건 현장의 혈흔을 깨끗하게 닦은 것으로 보였다. 즉, 범인은 집안에서 상당한 시간 머물렀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범인은 면식범이거나 피해자를 잘 아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었고 밖에서의 침입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파트의 현관문을 통해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침입자
집 안에 장시간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를 생각했다.
“남편? 친척? 잘 아는 사람?”
하지만 사건이 새벽에 일어났는데 그 늦은 밤까지 누가 그곳에 있었겠는가! 혹시 남편이 일찍 귀가 하여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남편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남편의 알리바이가 성립되는지 여부가 중요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으로 오는 시간과 퇴근한 시간 그리고 피해자가 사망한 시간을 알면 남편이 그 시간에 집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남편은 정상적으로 아침에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온 것으로 직장에서 확인되었다. 따라서 피해자의 정확한 사망 시간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다.
부검 당시 직장 온도 등으로 추정한 피해자의 사망 시간은 새벽 4시 정도 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편이 통상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인 7시보다 한참 전에 숨졌다는 것이다. 직장 온도 등에 의한 사망 추정시간이 약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남편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남편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의심스러운 것은 남편이 내가 현장에서 실험을 하는 내내 너무나 담담하게 실험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언뜻 본 그의 목에서는 약간의 긁힌 상처가 발견된 점이다. 이는 부인과 다투다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감정 결과
현장에 대한 감식을 마치고 연구소로 돌아왔다. 현장에서 채취한 증거물과 의뢰된 남편의 의류 등도 같이 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뚜렷한 범인을 추정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혹시 성범죄 쪽으로도 무게를 두고 부검 시 채취된 질 내용물에서 남성의 유전자형을 검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검출하는데 실패하였다. 남편의 바지에서는 소량의 혈흔이 발견되었는데 본인의 유전자형이 검출되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현장 감정 결과
Ⅰ. 사건 현장에 대한 혈흔 반응 실험 결과
1. 안방: 창틀, 조그마한 자갈, 경대 틈, 장판 밑 등에서 혈흔이 검출되었으며 장판 부분에서는 루미놀 시험 결과 닦은 흔적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유전자분석 결과 피해자의 유전자형이 검출되었다.
2. 거실: 소파 및 소파 밑 방바닥 등에서 혈흔이 검출되었으며 모두 피해자의 유전자형이 검출되었다.
3. 베란다: 창고 문, 베란다 창틀 일부, 아이스박스 등에서 혈흔이 검출되었으며 피해자의 유전자형이 검출되었다. 창고의 벽면 등에 닦은 흔적이 있었는데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4. 베란다: 배수구 주위에서 혈흔이 검출되었으나 오염 등으로 인하여 혈액형 및 유전자형이 검출되지 않았다
Ⅱ. 남편의 의류 및 피해자 팬티에 대한 감정 결과
1. 피해자의 팬티에서 정액 반응이 양성으로 나타났으나 정액반응이 매우 약하여 피해자의 유전자형만 검출되었다.
2. 남편의 바지 혈흔에서 남편의 유전자형만 검출되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뚜렷한 단서를 잡지 못 하고 수사는 계속 헛걸음이었다. 단지 하나의 소득이 있었다면 남편의 알리바이가 여러 가지 수사 결과를 통하여 입증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연구원의 다른 과에 의뢰된 증거물들에 대한 실험 결과에서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미궁 속으로
벌써 사건이 일어난 지 2주, 3주가 지났다. 하지만 범인의 단서를 잡지 못 하고 있었고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였다. 수사는 피해자의 주변인물을 대상으로 점점 넓혀갔다. 하지만 용의자를 잡는다 하여도 뚜렷한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증거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피해자 주변 인물에 대한 수사를 하던 중 피해자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피해자는 여러 명의 남자를 상대로 성관계를 맺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다. 그리고 남편이 근무하러 간 사이에 집으로 남자를 데려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남성 5명의 옷 등이 의뢰되었다. 하지만 의뢰된 옷 등에서 혈흔 검출 여부를 검사한 결과 모두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섬유의 동일성 여부를 보기 위하여 의뢰되었던 손톱에서 섬유흔이 발견되었다. 이들과 비교하기 위하여 의뢰된 옷들과 검출된 섬유흔과의 동일성 여부 실험이 실시되었다. 섬유흔이 발견되었지만 이들 옷들과 동일성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만약 손톱에서 발견된 섬유흔이 유사하다는 감정 결과가 나와도 그를 범인으로 확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즉, 같은 종류의 옷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뢰된 용의자들 옷 등에서 단서가 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사건은 점차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벌써 사건이 발생한지 4주째가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사건들에 밀려 이 사건도 점점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져가는 듯했다.
손톱 밑에서 범인을 찾다
이 사건은 계속 나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어느 날, 현장에 대한 혈흔 검출 시험 시 남편의 목에 긁힌 상처가 기억이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섬유흔 감정이 끝난 손톱을 가져오게 하였다. (살해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남성을 긁은 경우 손톱에 범인의 세포가 떨어져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부검 시 채취한 피해자의 손톱이 섬유흔 감정을 마치고 잘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알리바이가 성립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별로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설사 피해자의 손톱에서 남편의 유전자형이 나온다 해도 사건과 무관하게 다투다 난 상처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학자의 도리가 아닌가.
가져온 손톱을 필터페이퍼에 놓고 정밀하게 관찰하였으나 육안으로는 전혀 다른 이물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손톱 밑을 소량의 거즈를 이용하여 잘 닦아낸 후 바로 유전자분석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매우 양이 적었기 때문에 바로 유전자분석에 들어갔다. 보통 살인 및 강간 사건에서 피해자의 손톱이 의뢰되곤 하는데 범인의 유전자형이 검출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유전자분석 결과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결과를 얻었다. 남성 또는 여성을 구별하는 밴드 부분에서 남성을 상징하는 두개의 밴드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손톱 밑에서 채취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극소량의 세포에서 남성의 유전자형이 검출된 것이었다. 매우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잘 믿어지지가 않아 보고 다시 또 보았다. 혹시 다른 것과 혼돈한 것은 아닌가 또는 시료가 워낙 적다보니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만져서 실험자 또는 수사관의 유전자형이 검출된 것은 아닌가 등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나갔다. (매우 소량의 침이나 세포가 떨어져도 유전자형이 검출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으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경찰서 해당 형사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손톱에서 남성의 유전자형이 검출되었으니 용의자들의 시료을 채취해서 가능한 빨리 보내달라고 말했다. 연락을 하고 나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드디어 약 3주간 그렇게 애태우던 사건이 해결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더욱 그러하였다. 그리고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에서도 결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불륜의 끝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사람들과 남편의 시료가 담당 수사관을 통해 하루도 안 되어 연구원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채취하여 유전자분석에 들어갔다. 유전자분석은 DNA를 분리하고 증폭하고 전기영동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하루 정도에 감정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드디어 만 하루가 지나서 이들에 대한 유전자분석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손톱에서 검출된 유전자형과 비교하였다. 결과는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남편의 유전자형과는 다른 유전자형이 검출되었다. 남편의 목에 난 상처를 힌트로 실험을 하게 되었지만 정작 남편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남성 5명과 비교를 하였다. 그 중 1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결과를 해당경찰서로 통보하였다. 그 용의자는 바로 체포되었고 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의 집을 압수 수색하여 옷, 신발, 양말 등을 수거하여 의뢰하였다. 옷들은 모두 세탁이 되어 있어서 깨끗했다. 혈흔 검사를 해도 전혀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말에서 약한 혈흔반응이 있어서 이를 잘라 혈액형 검사를 실시하였다. 검사 결과 피해자와 같은 혈액형 검사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미제로 남을 뻔했던 어려운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피해자는 피의자에게 자동차까지 사주면서 애인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피의자가 피해자에게 이제 나는 가정도 있고 하니 그만 헤어질 것을 요구하였다 한다. 이에 피해자가 격분하여 욕을 하며 피의자에게 대들고 뺨을 때리는 바람에 홧김에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시신을 베란다 창고에 유기하였다 한다. 불륜의 최후 결과였다. 사건은 기분 좋게 해결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를 보는 듯하여 씁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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