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밤 아들과 어머니

by 해드림 hd books

혹한에다 폭설이 내려 어머니가 내려오지 마라 성화였지만,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달린 KTX로 순천 시골로 내려왔다. 순천은 워낙 따뜻한 지역이라 눈들은 금세 녹아 산들은 폭설이 내렸나 싶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시골집 크리스마스 이브, 지인이 보내준 두부를 안주 삼아 어머니는 맥주 한 잔, 나는 소주 한 병을 비우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머니와 오붓한 밤을 보냈다. 성탄 전야 미사를 모른 체 지낸 것이 벌써 몇 해째인지 모르겠다. 성모님께도 예수님께도 면목이 없지만 영혼조차 떠나 있는 게 아니니 성탄 전야를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싶다. 예수님도 태중에서 성모님과 함께한 시간이니까. 또한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어도, 수억의 거룩한 영혼들이 당신들과 함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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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의 시골 겨울밤은 더욱 고요하였다. 고요를 이기지 못한 산짐승 울음이 뒷산에서 터져나오곤 한다. 어둠 속에서 길고양이 두 마리가 토방을 지키고 있다. 저녁을 달라는 이야기기인데 초저녁 즈음 어머니가 주었다며 주지 말라신다. 이들도 긴 겨울밤을 나려면 배가 든든해야 할 터여서, 어머니 몰래 사료를 챙겨주었다. 이들은 저들의 밥을 우리가 사다 둔다는 것을 안다.

새벽녘 일어나 마당에서 바라본 하늘에는 별 꽃이 지천이다. 가장 추운 겨울밤이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별꽃들, 이 꽃들이 내게는 겨울의 전부이다. 도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새벽하늘 겨울 꽃이 시리도록 피어있는 것이다. 겨울이 몹시 싫은 나는, 시골 새벽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겨울 미감을 맛본다. 살갗에서 살얼음이 이는 듯한 혹한이지만 새벽하늘의 저 별들을 두고 쉬 방으로 들어설 수 없어서 옷깃을 여미며 한참 눈 덮인 마당을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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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장작으로 군불을 지펴둔 방 이불 속에서 두어 시간 몸을 더 뉘었다가 일어났다.

안방인 어머니 방의 고요가 깊다. 평소 주무실 때와는 달리 TV도 취침등도 꺼져 어머니의 방문이 더욱 고독해 보인다. 당신 숨소리라도 들리려나 귀를 세워보지만 몸을 뒤척이는 소리조차 없다. 아들이 내려와 있으니 더욱 깊은 잠을 주무시는 걸까.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다지만 어머니는 평소에도 새벽잠이 깊다. 혼자 생활하는 어머니는 냉기로 가득 찬 겨울 아침에는 나이가 들수록 일찍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냉기로 갑자기 체온이 떨어질 수 있고, 어두컴컴한 새벽녘에는 미끄러질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 새벽잠이 깊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앞산에서 동살이 퍼져 냉기를 어느 정도 밀어냈을 때야 밖으로 나오는 지극히 현명한 분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방이 하도 고요하니 방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안방 기온은 어떤지도, 이불은 잘 덮고 주무시는지도 궁금하여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고 싶지만 행여 깊은 새벽잠을 방해할까 싶어 어머니가 기침하는 기척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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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차 한 잔을 마시며 다소 찬기 서린 몸의 기운을 달랜 후, 붓을 꺼내 새해 문구들을 써본다. 2022년 새해 다짐으로 새벽마다 붓을 들어 켈리 연습을 하자고 마음먹었으나 꾸준하지 못한 탓인지 여전히 개발새발이다. 2023년에는 매일 멋진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삶이었으면 싶다. 아니, 지독히 힘겨웠던 2022년을 생각하면 아무 일 없는 하루만 이어져도 더 바랄나위 없겠다.

어머니가 일어나면 바로 들어가시는 주방 달린 방에 온풍기를 틀어 냉기를 몰아냈다. 방문을 열었을 때 따듯한 온기가 채워져 있어야 하는데 전기세 아까워하는 어머니가 늘 냉골로 해둔 채 생활하는 방이다. 자식 추울까 걱정은 해도 정작 당신 생활하는 데는 무신경 하는 어머니가 겨울이면 더욱 걱정이 되고, 자주 내려와 챙겨드릴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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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당으로 나갔다. 어느덧 앞산 너머에는 아침노을이 설레도록 붉다. 아무리 서울 한강 뷰가 좋다한들 시골에서 보는 아침노을만큼이나 할까. 앞집이 시야를 가려 대문을 벗어나야 온전한 마을 앞 바닷가 아침노을을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 집 마당에서는 앞산 귀퉁이 노을만 시야로 들어온다. 어서 돈을 벌어 시골집을 이층으로 지어 아침노을이든 달빛 떨어지는 밤바다든 마음껏 가슴으로 담으며 살 텐데 도무지 책들을 안 사니 어쩌면 평생 귀퉁이 노을로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어머니가 살아가 계실 때 이층 거실에서 아침노을을 보며 차도 마시고, 윤슬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도 하며 지낼 수 있을까 싶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고는 한다. 우리 해드림출판사가 늘 애옥살림이다 보니 어머니 앞에서 눅눅한 슬픔이 밀려오는 날이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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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간 어머니를 기다리듯 어머니가 일어나기를 아이처럼 기다렸다. 앞산에서 해가 떠올라 창호지 꽃무늬를 드러내고서야 일어난 어머니는 금세 아침상을 준비한다. 거의 매일 아침을 거르며 생활하지만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은 항상 나를 행복하게 한다. 서너 가지 반찬일 뿐이라도 어느 반찬 하나 젓가락 안 가는 곳이 없다. 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나면 나는 항상 소화제를 먹어야 한다. 며칠 굶주린 듯 나도 모르게 폭식을 하게 된다. 꼭 배가 고파서만은 아닐 것이다. 90세인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언제까지 받아볼 수 있을까. 궁핍한 삶에서 오는 갈증들을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으로 해갈 하는지도 모른다. 출판사를 운영하며 쌓인 스트레스도, 모든 고뇌와 번민도 어머니의 밥상 앞에서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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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마루로 쏟아진다. 현관문을 닫으면 작은 마루는 온실로 변한다. 어머니는 이 마루에서 사경(寫經)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사경을 하는 그 가슴 속 바람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안다. 90세 어머니가 이만큼 건강한 것도 커다란 복인데 어머니랑 함께 살 수 없는 나는 그저 목마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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