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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음날 Apr 01. 2023

태풍이 불면 TV도 날더라.

돼지도 날고.

제 기억에는 이렇게 생긴 흑백 TV였습니다. 

앞면은 볼록하고 뒤통수는 빨간색 컬러에 '다다다닥' 거리는 채널(뭐라고 부를까요? 채널선택?) 다이얼이 있었지요. 흑백 TV를 본 기억을 별로 없습니다. 워낙에 어렸기도 했고 흑백 TV라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창 당시의 미드 'V'의 다이애나가 쥐를 먹는 장면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때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것을 기억하냐면 이 빨간색 TV가 하늘을 날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마당을 잠시 날았던 것이지만. 아빠의 주사는 술을 마시고 집안의 모든 것들을 때려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세간살이며 문짝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부수었습니다. 사진 속의 빨간 TV는 마당을 가로질러 하늘을 잠시 날고 땅에 착지했습니다. '퍽' 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모든 걸 쏟아내고 죽어버렸겠지만 말이지요. 뭐, 언젠가는 저도 한번 던져진 적이 있긴 합니다. 얼굴이 사자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죽는 건 아닌가 했지만요.


어릴 때의 일들이 장면 장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하얀 백구가 하루 만에 죽어버린 일, 똥통에 빠져 울며 소릴 질렀던 일, 구렁이가 화장실에 출몰했던 일, 구루마에 토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저놈에 빨간 TV만  기억에 납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TV의 선명한 빨간 케이스가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까요. 되짚어 보면 아마도 나의 유아기 기억상실을 깨준 최초의 기억이 '파괴'였으며 그 매개가 저 빨간색 TV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유년의 행복했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집안이 부서지는 장면만 기억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아빠란 사람을 이해하려 해도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눠본 기억이 없습니다. 나는 잘못을 했고 따귀를 맞은 기억뿐입니다. 나는 잘못을 했다 쳐도 애꿎은 집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매일 두들겨 맞는지 모를 일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아빠를 분노로 빠져들게 하고 술을 진탕 마시고 모든 걸 저주하게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아빠와 나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다는 것 정도의 일만 알뿐 어떤 생활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남겨진 앨범이나 사진도 한 장 남아있질 않습니다. 남겨지거나 버려지는 건 슬픈 일인 듯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았을지 모를 태초의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있었을지 몰라도 기억 한 조각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고로 '아마도' 받았을 거라는 정도의 추측에 머물러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한 불행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행은 아무리 덧칠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 깊게 나를 파고들 뿐이었지요. 용서라는 것도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대상이 죽어 사라져 버리니 '용서하지 못한 나'만 남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이제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단서가 많지 않지만 그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거니 하는 정도의 이해를 하는 것으로 내적합의를 이룰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놓으려 놓으려 발버둥을 칠 때는 결단코 놓아지지 않더니 때가 되니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됩니다. 58년 개띠인 아빠는 장성한 자식얼굴도 못 보고 손주들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죽어서 가는 곳이 있다 해도 그곳에서 조차 마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놓아 버렸다는 것은 그런 소소하고 해도 될법한 감상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슬프다거나 안타깝다거나 하는 일로 감정과 눈물을 허비하지 않을 일입니다. 


'다다다닥'

'다다다닥'

'다다다닥'


흑백 TV의 다이얼을 끝없이 돌리는 6살짜리 남자아이의 손놀림이 어제의 일처럼 눈에 선합니다. 재밌어 죽겠다고 속삭이는 듯한 작은 등판옆으로 뻗은 팔이 끝없이 다이얼을 돌리고 또 돌립니다. 빨간색 흑백 TV가 하늘을 날았습니다. TV 입장에서는 이래나 저래나 죽는 건 매한가지였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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