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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레 Nov 09. 2024

장면 여덟, 어른들은 모르는 4시 반  

4시 반에 나타나는 천사

버스를 탈 때 고민되는 게 있다. 버스가 다가오면 마음이 도곤거린다.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의 얼굴을 빼꼼 확인한다. '인사를 할까? 말까?' 생각하다 역시 타이밍을 놓친다.


'안녕하세요'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버스에 오르면 엄마는 늘 기사님께 인사를 했다. 그럼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번에는 나도 엄마처럼 인사해야지. 작은 꼬마였던 나는 엄마 뒤에 가려졌지만 엄마 다음으로 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작은 목소리로.


어른이 된 나는 바쁜 출근시간이나 모두가 지친 퇴근 시간대에 버스를 탄다. 버스에 올라 기사님께 인사를 한다. 마스크에 반쯤 가려진 얼굴. 눈만 봐도 지쳤다는  금방 있었다. '빨리 타세요, 빨리! 위험해요. 들어가세요.' 만원 버스에 몸을 욱여넣는다. 왠지 마음 한편 쓸쓸해지고 인사라는 것이 무색해진다.  버스가 출발하고 손잡이를 잡는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썹을 찡그리고,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나는 누군가 발을 어디에 둘지 몰라 울컥한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하지 않는다. 마음이 가난해졌다. '가난해서 나는 줄 수 없는 사람이야.' 작은 인사나 친절은 모두 소용없는 것이라 믿었다. 모든 사람들이  빨리, 더 많이, 더 좋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쪼그라든 마음까지 다치게 할 순 없었다. 어느 날부터 표정을 숨기고 싶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나를 들키기 싫어서, 마스크를 끼고 두툼한 잠바에 나를 숨기고 걸었다.


길거리에 아이들이 많았다. 가을 햇살은 쏟아지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걷는다. 횡단보도 앞에 선 나는 맞은편에 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손에 컵떡볶이를 쥐고, 어묵 국물을 호로록 마시고. 아이들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까르르 티 없이 웃었다. '나도 저렇게 웃었던 같은데...' 그게 언제였더라. 이야기 같았다.

초록불이 되자, 횡당보도를 걸었다. 아이들은 통통 뛰며 걷기 시작했다. '야! 안녕!' 누군가와 인사하고. 옆 친구와 팔짱을 끼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모든 풍경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과거에 잠시 머물다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반이었다. 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이라는 걸 새삼 알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렇게나 여유로운 시간이라니. 그때 유치원 버스가 내 앞을 지나갔다. 참새 같은 아이들이 자리에 총총 앉아 있었다. 한 여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작은 손을 창문 가까이에 대고 살살 흔들었다. 잘 못 본 걸까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다시 여자아이를 봤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작은 손을 조금 세게 흔들어 보였다.


하회탈 같은 아이의 눈. 살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안녕?' 작게 말해보았다. 손을 흔들려고 했다가 어색해서 인사하지 못했다. 눈으로는 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가며 나를 끝까지 쳐다봐 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놓치지 않았다. 내게 계속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고장 난 사람처럼 살며시 손을 들었다. 아이의 얼굴이 점점 멀어졌다. 후회했다. 마스크 벗고 제대로 흔들어 줄걸.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은 어른이라니.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이렇게도 작은 인사가, 작은 웃음이, 작은 손짓이 마음을 녹여버릴 줄 몰랐다. 정말 고마웠다.

세상에 없는 무해한 인사였다. 노란색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거리를 보니 땅이 온통 노란빛 황금으로 빛이 났다. 어른들은 모를 것이다. 4시 반에 나타나는 천사를, 그 마법 같은 인사를.



4시 반, 노랗게 물든 거리. 마법이 일어났던 장소.


PS.

꽁꽁 얼어붙은 못난 어른의 마음을 한 아이가 녹여버렸습니다. 4시에 거리를 걸어보세요. 천사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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