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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레 Nov 15. 2024

장면 아홉, 짝사랑을 응원하는 이유

좋아하는 마음이 무너지고 알게 된 것

도서관 책상 위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었다. 김민재 많이 좋아했어(하트). 어떤 말은 보이지 않게 죽죽 그어져 있었다. 많이 좋아했어. 많이 좋아했었다는 말. 설레지만 어쩐지 뒷맛이 씁쓸하다. 한 시절이 끝난 기분. 문득 너를 좋아했던 마음이 구름처럼 지나간다. 그 아이의 새하얀 얼굴이 두둥실 떠오른다.


옆 집에 살던 그 아이의 형은 나의 언니와 친구였다. 우연히 복도에서 그 아이와 형을 마주치면 언니는 반갑게 인사했고, 나는 언니 뒤로 반쯤 숨어있었다. 세 자매의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남자 형제였다. 어색한 마음으로 힐끔 쳐다보았고 그 아이는 형 옆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중학교 올라가던 해,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낯선 교실에서 그나마 얼굴이 익숙한 그 아이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 아이는 조용하지만 인기가 많았다. 공부도 잘했고 누구에게나 잘 웃었다. 웃을 때 눈이 반달 같았다. 집으로 가던 길, 아파트 복도 끝에 그 아이가 보였다. 열쇠로 집 문을 열고 있었다. 인기척에 나를 쳐다봤고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같은 반이긴 해도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었다. 갑자기 뒤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었다.


"어, 안녕."


그 아이가 인사를 건넸다.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지어주던 표정. 반달 웃음이었다. 어색함은 한순간 깨져버렸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 안녕."


하교를 할 때마다, 등교를 할 때마다 그 아이를 마주칠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거울을 볼 때마다 표정 연습을 해 보았다. "아, 안녕." 그때의 내 표정, 분명 이상했을 것 같았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조심 걸어 복도를 확인하곤 했다.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옆집에서 소리가 나면 잠자코 있었다. 그 아이의 발자국이 우리 집을 다 지나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갔다. 자꾸만 두근거리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 아이는 수학 시간을 좋아했다. 짝꿍이 수학을 물어보면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러면 앞뒤에 있던 친구들도

문제집을 가지고 달라붙었다. 나는 수학이 제일 싫었는데, 그날따라 선생님이 나와서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다. 칠판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조용한 정적에 숨이 막혔다. 손에는 진땀이 났다. 칠판 앞에 선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분명 풀어본 문제인데. 아는 문제인데. 나를 바라보고 있을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점점 작아지고 어지러웠다. 결국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 세상이 무너졌다.


한동안 수학 문제집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수학이 밉고, 선생님이 미웠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싫었다. 그 아이를 마주치면 피했다. 집 앞에서 만나게 된 날. 그 아이의 인사를 무시하고 집으로 곧장 들어갔다. 마음속 먹구름이 비가 되어 내렸다. 투둑.투둑.투둑.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모든 게 이상했다. 그 아이와 인사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실컷 울다가 개운해졌다. 나는 수학 문제집을 펼치고 문제와 마주했다. 열심히 풀었다. 풀고 풀었다. 복잡한 마음과 달리 정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마음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를 풀고 책을 닫았다.


수학 시험이 있던 날. 그날이 떠오르고, 그 아이의 얼굴도 떠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문제를 풀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중학교 첫 시험이 끝났다. 짝사랑을 완전히 망쳤다.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달 웃음을 지은 옆모습이 슬쩍슬쩍 보였다. "아마 좋아했던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은 수학도, 선생님도, 거울에 비친 나도, 그 아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작디작은 파동들이 내 마음을 무너뜨리고 간 후에야 알았다. 그때야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도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은 내 마음 간직하는 일. 누군가를 좋아했던 순수한 마음이었으므로. 누군가의 용기 있는 고백을 응원한다. 죽죽 그어놓고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도 열렬히 응원한다.


도서관 책상 위에 적혀있던 고백


PS. 정말 귀여운 고백이죠? 좋아한다는 말 뒤에는 하트가 있었어요. 눈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은 모르고, 당신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 마음 오늘은 꽉 안아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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