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닦은 다음에 돈 내라고 하려나 보다, 했는데 아니다.
그냥 닦아준다.
그래서 주유하고 나서 거리로 나서면
눈이 시원하다.
나는 궁금해졌다. 돈도 안줬는데 창문을 이렇게까지 눈부시게 닦아주는 게 의아했다. 왜냐면 튀르키예가 깔끔함과는 거리가 있어서다. 길거리에 담배꽁초나 개똥도 많고, 식당 테이블도 깨끗하지 않아서 다시 닦아달라 하는 일이 다반사다. 사실 이건 튀르키예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럽 어느 나라에선가 내 친구는 식당 직원에게 이런 질문도 받아봤으니 말이다.
“한국인들은 식당에 오면 왜 티슈로 테이블을
열심히 닦는 거야?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너희가 아니라 나잖아.”
그는 ‘너희가 더러워서요’ 라고는 말 못하고 ‘한국인은 깨끗한 것을 좋아해요’ 라고 대답했다.
티슈로 테이블을 열심히 닦던 그 친구가 청소에 일가견이 있긴 하다.
그는 우리집에 놀러 오면 현관에서부터 놀라고 시작한다.
"세상에, 지금 집에 한 삼십 명 있니?
신발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와있어"
참고로 그 친구네 집 현관엔 신발이 단 한 켤레도 없다. 이불 깔고 자도 될 정도다.
지금 벗고 들어온 신발도 바로 신발장에 정리하기 때문이다. 친구가 말했다.
"현관이 깨끗한 집엔 도둑도 안 들어온대."
식탁으로 와선 차마 앉지 못하고 정리를 하고 있다.
"아니 이게 어떻게 4 인용식탁이야!
4인이 앉을 수 있어야 4인용 식탁이지!!"
이상하게 우리집 식탁은 점점 좁아진다. 식탁의 반은 늘 책, 간식봉지들, 그 외 잡동사니들로 채워진다.
분명 큰 식탁을 샀는데 너무 좁아 네 명이서 다닥다닥 붙어 밥을 먹는다. 가족애가 절로 싹튼다. 큰맘 먹고 싹 정리해도 길게 가면 한 달이다.
이런 식으로, 러닝머신은 옷걸이가 되고 러닝머신을 버리자 식탁의자가 옷걸이가 된다. 의자가 옷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야 옷들이 옷장 속에 정리된다. 깔끔하게 사는 것도 습관인가 보다. 갑자기 글이 청소 쪽으로 흘렀나 싶지만 의외의 지점에서 의문이 풀렸다.
며칠 전,이스탄불에 오래 산 친구가 이런 이야길 하는 것이었다. 앞 동에 사는 이웃을 만났는데 자기더러 창문 좀 닦으라고, 너희집 창문이 더러워서 좋은 기운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더란다. 튀르키예에 창문이 깨끗해야 복이 들어온다는 미신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잘 보면 오래된 건물도 창문은 깨끗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유소에서 창문을 투명하게 닦아주는 것도 그 연장선인가 싶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다리 떨면 복 나간다 하는 미신들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튀르키예에도 있었다. 가구를 둘 때 남동쪽에 두어야 복이 들어온다든지 하는 풍수지리도 생각난다. 창문이 깨끗하면 복이 들어온다니, 정말 그럴 것만 같은 미신이다.
샤워하고 나오면 뿌예진 거울을 깨끗하게 닦던 엄마가 생각났다. 이렇게 김 서릴 때 슥슥 닦아주면 독한 세제도 필요 없다며 엄마는 말했다.
"이런게 바로 생활의 지혜라고 하는 거야.
거울이 더러우면 마음도 탁해지는 것 같지 않니?"
그런데 '창문이 투명해야 복이 들어온다'는 말이 꼭 '마음이 투명해야 행복이 들어온다'는 말 같다.
청소 같은 단순한 일을 남에게 맡겨버리면 내게 주어진 행복이 사라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오늘은 창문을 닦아보려 한다. 그 단순한 기쁨을 누리며 마음의 투명도를 높여 보련다. 덤으로 투명한 유리를 통해 복이 들어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