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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3개의 담배꽁초가 전시된 ‘순수 박물관’ -2

시간이 사라지는 곳

by 장미화


관람객들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잊을 겁니다.
삶에서 가장 커다란 위안은 바로 이것입니다.



책 속에서 주인공 케말이 말했다. 나는 박물관 무료 입장권이 새겨진 페이지에 북마크를 하고 책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파묵이 이야기하는 '시간이 사라지는 세계'를 찾았다.


골목에 들어서자 <순수 박물관>의 붉은 건물이 보인다. 건물 앞에서 청춘 남녀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들의 모습에 케말과 퓌순이 겹쳐진다. 코너를 돌아 티켓 창구 앞에 섰다. 창문이 열리고, 장발에 섬세한 외모의 남자가 얼굴을 내민다. 내 손에 들린 책을 보더니 달라는 손짓을 한다. 한국어 개정판을 처음 보는지 표지를 잠깐 살펴보더니 “코레(코리아)?” 라고 물었다. 내가 큰소리로 “에벳(네)!” 대답하자 남자는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정말 책에 그려진 입장권이 유효할까?



정말이다! 그는 순수박물관 입장권에 진지하게 도장을 찍어주었다. 도장은 소설에서 큰 의미를 지닌 ‘퓌순의 나비 귀고리’ 문양이다. 남자는 혹시라도 책에 인주 자국이 묻을까봐 조심스럽게 호호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는 ‘THE MUSEUM OF INNOCENCE’ 글씨와 그림이 새겨진 작은 종이를 끼워 넣어 준다. 그런 세심한 몸짓이 정말 기분 좋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른쪽으로 4213개의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온다.


담배꽁초 하나하나에 깨알 같은 설명이 쓰여 있다. 어느 곳의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녀가 담배를 어떤 방식으로 껐는지, 표정은 어땠는지 등등의 설명이다. 저 글씨는 모두 오르한 파묵 작가 본인의 것이다. 정말 지독하게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계단을 올라가니 책의 챕터 순으로 물건들이 전시돼 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놀랐다. 왜 난 <순수 박물관>에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까. 마치 이곳을 나만 아는 비밀 장소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 것에 피식 웃음이 났다. 줄 서서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것은 박물관 주인 케말이 애초에 금지했다.) 그래도 유명 작가의 박물관인 건 확실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도 꽤 됐고, 나처럼 책을 펼쳐 들고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물관의 분위기는 케말이 원한대로 '감정적'이었다. 케말이 동경했던 모로의 미술관을 묘사한 부분이 떠올라 그 부분을 다시 펼쳐 보았다.


화가 모로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이 사망한 후 그림 수천 점이 전시될 미술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이 층짜리 화실과 자신이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가문의 저택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만든 것이다.

집을 미술관으로 전환하자,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의 의미가 반짝이는 추억들의 집, ‘감정적인 미술관’이 되었다.

경비원들이 졸고 있는 미술관- 집의 빈방을 마룻바닥을 삐걱거리며 걸을 때는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후 이십 년 동안 나는 이 미술관을 일곱 번 더 찾았고, 그때마다 전시관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똑같은 경외감을 느꼈다.)


마룻바닥을 삐걱거리며 걸을 때, 나는 케말의 사랑을 생각했다. 퓌순의 물건들을 보며, 그 '의미가 반짝이는 추억의 집' 안에서 어떤 감정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행복이란 무얼까. 케말은 친구들이 ‘내가 뭐라 그랬어?’ 라는 표정을 지으며 언젠가는 네가 아주 행복해질 거라고 말해줄 때, 이제 자기 삶에서 행복의 가능성은 없다는 걸 절감했다. 케말의 모든 행복은 오직 퓌순에게서만 왔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는 내밀한 행복이었다. 대다수가 참 안됐다고 생각했던 이의 삶이 어쩌면 진짜 행복 안에 있었을 지도.


문득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봤다. 나는 나중에 그의 어떤 물건들을 보며 그를 떠올릴까. 일단 사십에 들어서며 벌써 반백발이 되어버린 하얀 머리칼이 떠오른다. 빗을 때마다 이건 ‘모발계의 혁명’이라고 말했던 ‘탱글티저’ 빗, 구멍 나면 새로 주문해 입는 늘 똑같은 민무늬 흰색 티셔츠, (어느날 옷가게에서 발견하고 한참을 웃었던) 잉어가 잔뜩 그려진 팬티, 세계를 누비며 모은 배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백팩… 세상에, 무슨 일일까! 그의 물건들을 떠올리니 갑자기 눈물이 고인다. 물건과 함께한 그의 말투나 행동, 머리칼의 냄새, 눈빛, 분위기가 살아난다.


<마담 보바리>의 작가 플로베르도 연인 루이즈 콜레의 머리카락 한 줌과 손수건, 슬리퍼를 서랍에 보관해 두었다. 이따금 그것들을 꺼내 어루만지고, 슬리퍼를 보며 그녀가 어떻게 걸었는지 떠올렸다고 한다. 과연 어떤 이가 지닌 물건에는 지금 곁에 없는 그를 가까이 불러오는 힘이 있나 보다. ‘시간’을 사라지게 하는 힘.




아마 그 동네를 찾을 때면 <순수 박물관>으로 다시 발걸음이 향할 것 같다. 그땐 옆 골목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더 사는 게 좋을 것이다. 나의 책에 '퓌순의 나비'가 새겨진 도장을 쾅, 찍어주는 그 순간의 기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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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